[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2)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면접시험에서 만난 이병철 회장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2)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면접시험에서 만난 이병철 회장
  • 뉴스N제주
  • 승인 2024.04.0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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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고 총장의 인생은 60년생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을 음미해 보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 총장이 걸어온 길이 굉장히 흥미롭고 제주의 섬소년이 어떻게 총장까지 올라갔는지 그의 행보를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접해 보는 것이다.

이번 장은 고 총장의 대학원 시절 면접에서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을 술회했다.

고 총장은 그때 내가 기자가 되었더라면 세속적으로는 출세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 총장은 그러나 내 인생은 격랑의 파고에 휩쓸렸을 것이라며 내 기질상 기자 생활은 많은 파란을 불러일으켰을 테고 세상과도 많이 충돌했을 것이라고 토했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아쉬움들이 남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더 많은 역할로 인생을 걸어왔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러나, 인생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당시에 최선을 다해 살아 왔을 선배 어르신들의 족적을 우리는 경건하게 존경해야 한다. 우리 세대 어르신들은 그야말로 배고픔이다. 이러한 충족을 위해 자신의 꿈, 가슴에 품었던 꿈들을 바로 펼치는데 제약이 많았다. 가정을 꾸려야 하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무리 잘난체 해도 나보다 앞선 선배님들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욕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야말로 치열하게 살았던 인생이기 때문이다.

고 총장님의 인생에 있어서 수많은 명사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자신에게 도움되는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런 완성된 인격체가 지금의 고충석, '난을 이겨내고 분한 업적을 이뤄낸 학, 고충석' 이라는 사람이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회한도 갖지만 그나름대로 멋있는 인생이다. 늘, 고 총장님의 건강을 기원해 본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12번 째 이야기 :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면접시험에서 만난 이병철 회장

나의 대학원 생활은 쉽지 않은 과정을 겪고 있었다. 앞으로도 연착륙할 것 같은 전망도 없었다.

하루는 이런 처지를 잘 알고 계셨던 김영훈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공부가 더 힘들어지네. 중앙일보에서 기자를 채용한다고 하는데, 한번 지원해 보게.” 교수님 권유대로 기자시험을 봐서 최종면접까지 올라갔다.

당시 중앙일보 김인호 편집국장은 제주 출신이었다. 마침 김국장의 조카가 대학선배였는데 가끔 만나 술도 한잔 하는 사이였다. 선배를 통해 김 국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최종 면접날짜가 다가 왔다.

면접장소에서 이병철 회장을 처음으로 보았다. 지상으로 보던 분을 직접 만나보니 역시 어떤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 옆에는 한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면접 때 관상가를 옆에 두고 면접을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무슨 질문을 받아서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관상이 저널리스트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대학 선배는 다른 관문을 다 통과해도 이병철 회장이 직접 주관하는 최종면접에서 떨어지면 구제방법이 없다더라고 숙부인 김인호 편집국장이 말했다고 했다. 나를 위로해주러 온 선배와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때 내가 기자가 되었더라면 세속적으로는 출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인생은 격랑의 파고에 휩쓸렸을 것이다. 내 기질상 기자 생활은 많은 파란을 불러일으켰을 테고 세상과도 많이 충돌했을 것이다.

그 관상쟁이가 관상을 보긴 잘 본 셈이다.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당시는 연세대 대학원 원생 수도 얼마 안 되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요새 기준으로 보면 교수 수도 전공별로 구색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아마 행정학과의 경우 대학원 학생 수가 7~8명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배로서는 경기대 총장을 지내신 최호준 교수, 국회의원과 주일 대사를 지낸 권철현 선배가 있었다. 그 밑으로는 훗날 대학교수가 된 몇 분이 더 있다.

당시는 나라 전체가 잘 살지 못한 때라 학부를 졸업해서 빨리 직장을 잡는 것이 우선이지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 드물었다. 나와 같이 행정학과를 졸업한 동기생 중에서 대학원 코스를 제대로 밟고 대학교수가 된 사람은 나 포함 두 사람뿐이다.

물론 그 후 경제 상황이 구조적으로도 좋아져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후배들이 급증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대학원 진학 학생 수는 경제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 학생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강의가 종합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많았다. 그 당시 한국의 대학원 실정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비슷했을 것이다.

원서나 관련 논문( article)을 조금 읽고 term paper(학기말 논문)를 제출하면 한 학기가 끝났다. 그야말로 미국의 대학원들처럼 치열하게 공부시키고 시험 보고 발표시키는 그런 교육과정이 아니었다. 학구열에 대한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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