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1)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75년 대학원을 복학하고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11)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75년 대학원을 복학하고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03.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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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고 총장의 인생은 60년생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을 음미해 보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 총장이 걸어온 길이 굉장히 흥미롭고 제주의 섬소년이 어떻게 총장까지 올라갔는지 그의 행보를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접해 보는 것이다.

이번 장은 고 총장의 대학원 시절 가난한 대학원생들과의 상황을 설명했다.

70년대 당시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먹을 게 하나 없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고 총장님의 이 때 상황을 보면 정치적으로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없는 행정가의 모습보다 다이나믹한 정치생활을 했으면 의원 배지도 달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 글을 통해 스쳐지나간다.

고 총장은 어려운 시절, 배고픈 시절,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 온갖 어려움을 다 이겨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회한도 갖지만 그나름대로 멋있는 인생이다

늘, 고 총장님의 건강을 기원해 본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11번 째 이야기 :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75년 대학원을 복학하고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75년 가을 학기에 대학원에 복학했다. 마땅한 거처도 마련하지 못한 채 연세대학교 대학원 건물 연구실에서 생활했다. 거기서 먹고 자며 지냈다.

당시에는 나처럼 학교에서 지내는 가난한 대학원생들이 꽤 있었다.

그들 중에는 훗날 연세대학교의 교수가 되는 등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대학원 당국은 대학원 건물이 목제 건물이라 겨울에 화재 위험 등 안전문제가 있으니 연구실에 기거하는 학생들에게 기거는 안된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천명했고, 해당 학생들을 설득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연구실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대학원생들의 처지를 대변, 대학원 당국과 크게 충돌했다.

결국, 대학원 방침의 철회를 견인해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킨 꼴이다. 그 방법 또한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무례한 짓이었다. 아마 모교가 아니었으면 큰 징계를 받았을 것이다.

하루는 행정학과 대학원 주임교수이신 김영훈 교수님이 나에게 지금 최호진 대학원장님이 구내식당, 평화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으니 찾아뵙고 그때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말씀하셨다.

김 교수님은 당신의 체면도 있고 하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에게 다짐까지 받았다. 식당으로 가 용기를 내서 저녁식사를 하고 계신 대학원장님께 사과를 드렸다. 교수님께서는 오히려 젊은 사람이 그럴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당신 사위도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취직이 않되면 부탁하라시며 격려해 주셨다. 최 원장님은 한국 재정학의 태두이시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셨다. 연세대의 중견 교수들도 그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교수들에 대한 호칭도 ○군! ○군! 군이라고 불렀다. 그런 분 면전에서 큰 무례를 범했는데도 괘씸하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장래를 걱정해주셨다. 참 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서울 광화문의 조그만 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다방으로 들어오는 교수님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윤기중 교수 등 몇몇 교수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대 한국 최고의 석학으로 당당하던 최 교수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풀어진 눈동자에 너무나 초라하고 왜소한 모습이었다. 인사를 드릴 형편도 되지 못해 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늙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쪼그라들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는 것일까?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희망을 더 가질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그래서 헤밍웨이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 아닐까? 늙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서 최 교수님의 부음을 접했다. 카리스마 넘치지만, 가슴이 따뜻했던 교수님의 부음에 만감이 교차했다.

여담으로 교수님을 모시고 오시던 윤기중 교수님은 요새 유명해진 윤석열 검찰총장의 부친이다. 윤기중 교수님과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10일 정도 폴란드, 동독, 구소련을 같이 여행했다.

윤 교수님이 여행단의 단장을 맡으셨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전병재 교수님이 간사를 맡으셨다.

전병재 교수님은 최호준 대학원장 밑에서 교학과장을 했다. 대학원과의 충돌사건 때 나는 전교수님께 너무나 학생으로서 몰상식적인 행동을 했다. 그 일로 전병재 교수는 교학과장 못해 먹겠다고 하면서 보직 사표를 내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늘 마음 한편 전 교수님께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과드릴 기회가 없었다. 늦었지만 진심으로 지난날에 대해서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역지사지, 내가 교수를 해보니 전병재 교수님의 분노나 나의 잘못도 잘 성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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