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김두자 시집, 꽃처럼 산다,『대한.현대시단사』발행, 100쪽, 풍경
풍경
김두자
창을 열면 한켠에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또 한쪽에 송림으로 덮인 섬이 보인다
해안도로는 정비되어 있고
그 옆에 방파제까지 파도 왔다 가네
바다는 억겁을 그 자리 지키네
이토록 고른 호흡을 하면서
잠시 나 왔다 간다
창가에 서성인다
바닷바람을 맞는다
방안에 침대 텅 비어 있다
겨울꽃이 저만치 피어 있다
우두커니 거울만 걸려 있다
주전자에 물이 끓는다
탁자에 커피 한 잔 향기 가득하다
『수식(修飾)이 절제된 풍경묘사의 백미, 존재의 고요』
사진이나 회화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풍경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관객도 공감하게 된다. 그 풍경에 나타나는 사물들의 자태와 표정을 통해 작가의 의도가 관객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시에서도 풍경을 행간에 불러들여 의인화하거나 풍경들의 표정을 통해 화자의 사유를 표현한다.
풍경을 묘사한 시에서 수식어 사용을 절제하여 사물의 관점을 독자의 몫으로 돌린 시는 흔치 않다. 김두자 시인이 시의 행간에 불러들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첫 연의 풍경에서 화자가 여행을 가서 숙소로 택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창을 열면 한켠에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고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풍광 좋은 휴양지의 레저시설인 듯하다. 바다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 한쪽에 송림으로 덮인 섬이 보인다.”는 풍경에서 섬은 쉽게 접안할 수 없는 피안의 섬으로 다가온다.
“해안도로는 정비되어 있고/ 그 옆에 방파제까지 파도 왔다 가”는 곳이라면 어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 항이나 포구일 터인데, 1행~4행까지의 풍경묘사에서 어떤 수식어나 관념어가 절제된 행간의 풍경은 단아하여 독자의 관점에서 풍경이 느껴지도록 간결하고 명료하다.
5행에 가서야 “바다는 억겁을 그 자리 지키네”라는 절제된 묘사로 풍경 관조하고 있어, 화자가 잠시 머무는 순간과 바다의 억겁(億劫)이라는 시공간적 대비간극이 사유의 흐름을 깊이 비틀고 있다.
화자 홀로 풍경의 고요에 머물고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가?“이토록 고른 호흡을 하면서/ 잠시 나 왔다 간다.”는 2연의 표현을 볼 때, 화자는 일상을 떠나 바닷가를 찾아오는 일탈을 통해 호흡을 고르는 일, 즉 삶의 가쁜 숨을 조절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 억겁의 바다를 바라보는 화자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가고 배들이 누군가를 싣고 항구를 떠나는 풍경 속으로 자신을 들여보내지 못하고 “창가에 서성”이는 것은, ‘억겁’ 그 자리를 지키는 바다 앞에 ‘잠시’ 머무는 너무도 미약한 존재인 자아를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창가를 서성이던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창문을 열어 “바닷바람을 맞는”것이다. 먼 시야의 끝을 바다를 향한 얼굴에 바닷바람이 스쳐갈 때, 화자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끝없는 여행을 떠나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동안이나 화자가 창문을 열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바다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3연에서는 화자의 시선이 창문 밖에서 거두어져 방안 주변으로 옮겨진다. 방안의 풍경 묘사에도 사물을 수식하는 시어는 절제되어 있다.
“방안에 침대 텅 비어 있다”는 행간은 ‘인간은 침대를 만든 존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방을 사용권을 포기한 것처럼 건조하여 들어갈 수 없는 유리벽 밖에서 타인의 방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일 것 같다.
화자의 동공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은 고요하다. “겨울꽃이 저만치 피어 있다.”는 행간의 ‘저만치’라는 간격으로 인해 동백꽃, 수선화, 포인세티아 같은 어떤 겨울꽃 향기도 맡을 수 없다.
“우두커니 거울만 걸려 있다.”고 반추의 거울을 벽에 버려둠으로 풍경을 보는 화자의 풍경여행은 막을 내린다. “주전자에 물이 끓”고, “탁자에 커피 한 잔 향기 가득” 피어오르는 공간에 고요만 가득하다. ‘커피 한 잔’일지라도 향기가 있는 풍경은 외롭지 않다. 다만 풍경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풍경 밖에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외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