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8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홍어
[김필영 시문학 칼럼](8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홍어
  • 뉴스N제주
  • 승인 2024.03.16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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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권순자 시집, 『붉은 꽃에 대한 명상』<문학의 전당 시인선 168> 54쪽, 홍어

홍어

썩어가며 꿈을 자주 고쳐 꾸다가

비늘이 굳어지고 눈물은 말라갔다

앙다문 울음은 물큰한 내음을 어룽지며

알싸한 맛을 키웠다

새까만 새끼들이 썩어가는 세월을 발라먹는 동안

옹근 심줄도 연골도 삭아

매끄럽고 탄력 있는 성명들은

어미 애비라는 시큼한 이름으로 남았다

비린내 나는 근력은 곰삭아

푸른 시간도 함께 부패되고

지느러미는 항해를 잊었다

이제 붉은 맛으로 혀를 찌르고

온몸으로 물살을 불러

목구멍을 쏘리라

물길은 지워지고 비좁은 바다로 흘러가리라

뜨거운 바다 네 가슴속에서

물결치리라

저문, 지친 하루를 피어 올리는

타오르는 석양처럼 붉게 데우리라

어두워진 속을 확 밝히리라

소멸하는 순간 가장 빛나는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상실과 소멸을 통해 돋아난 자유의 지느러미』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물은 그 변화를 통해 성장과 극복과 상실의 과정을 겪으며 소멸해 간다. 소멸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존재의 가치가 빛나기도 한다. 어떤 삶이, 어떤 소멸이 빛나는 가치를 남기는가? 권순자 시인의 「홍어」를 통해 소멸을 통한 존재의 가치를 들여다본다.

동해 가까이 살았을 시인이 ‘홍어’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에 더욱 흥미롭다. 제목을 읽는 순간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하는 듯 했지만, “썩어가며 꿈을 자주 고쳐 꾸다가 비늘이 굳어지고 눈물은 말라갔다”는 행간에서 홍어는 바다를 떠나왔으나 실존하는 존재로 다가온다.

“꿈을 자주 고쳐 꾸”고 있다니 그 꿈 얘기가 궁금해진다. 홍어가 “비늘이 굳어지고 눈물은 말라”가고 있었으니, 외모가 볼품없이 변해가는 과정과 시각기능의 상실과정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따라서 화자가 홍어를 보는 시안(詩眼)은 홍어의 생사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소멸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시는 홍어의 부패가 아닌 삭아가는 상실의 과정에서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외모의 면면을 열거한다. 맨 먼저 체구에 비해 본디 ‘작은 직선의 입’을 주시하고 “앙다문 울음”을 사유해 낸다.

입을 굳게 다물음으로 “물큰한 내음을 어룽지며 알싸한 맛을 키웠다”고 홍어맛의 탄생의 비밀을 강조한다. 이는 시를 읽는 독자 코에 스치는 썩어가며 진동하는 ‘암모니아 냄새“가 아니라 ‘알싸한 맛을 위한 물큰한 내음’이다. ‘눈물이 말라가는 눈과 앙다문 입술’은 상실의 아픔을 참아낸 또 다른 존재의 몸짓인 것이다.

화자는 홍어의 몸에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외면적 변화를 통해 내면의 변화를 감지한다. 홍어자궁 속 새끼들이 썩어가는 것을 “세월을 발라먹는” 것이라고, “옹근 심줄도 연골도 삭아”내리는 것을 ‘근력이 곰삭는 것’이라고, 존재의 삭힘을 통해 그려내는 변화를 투시하고 있다.

“푸른 시간도 함께 부패되고 지느러미는 항해를 잊었다”는 표현이 바다와의 단절이라는 망각의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푸른 시간의 부패라는 바다와의 단절은 과거의 삶일 뿐, 존재의 단절이 아니다. 홍어의 존재의 가치는 날개지느러미의 나래의 멈춤의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삭힘’이라는 소멸과정을 통해 다시 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홍어는 붉은 속살을 드러내어 또 다른 바다를 향할 의지를 밝힌다. 화자는 더 이상 칼날을 세워 홍어의 몸을 해부하지 않는다. “붉은 맛으로 혀를 찌르고/ 온몸으로 물살을 불러/ 목구멍을 쏘리라”고, “물길은 지워지고 비좁은 바다로 흘러가리라”고, 함으로 온몸으로 시간과 존재의 가치가 증명되는 또 다른 바다를 향해 ‘붉은 몸’이 예비 되었음을 밝힌다.

홍어가 또 하나의 “뜨거운 바다 네 가슴속에서 물결치”며 항해할 때, 썩은 물고기가 아니라 소멸하는 순간 오히려 가장 빛나는 홍어인 것이다.

삭아가고 소멸해가는 삶 앞에 어떻게 당당할 수 있을까? 잊혀져가는 친구를 불러 “저문, 지친 하루를 피어 올리는 타오르는 석양처럼 붉게 데우”며 “어두워진 속을 확 밝”혀줄 잘 삭은 홍어 한 접시 가운데 두고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며 생각해 봄직하다. “소멸하는 순간 가장 빛나는” 잘 발효된 인생이기를 빌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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