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이 솔, 한국현대시 11호. 2014. 상반기호, 129쪽. 흑백으로 흐르는 센티멘탈리즘)
흑백으로 그리는 센티멘탈리즘
이 솔
설탕이 사르르 녹고 있다
말 없는 말들
커피잔 파문에 감기며
저녁 해를 끌고 가는 긴 그림자
통유리창 밖으로 흐르는 흐릿한 강
시인들이 하얀 카페에서 강물을 보고 있다
문득 굵은 빗줄기가 강물을 두드려 준다면
강물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연필을 깎아 수첩에 시를 쓴다
향나무 연필향이 강의 속내를
종이 위에 내리는 사각사각 글발
말 없는 말을 주고받는 시인들
강은
자유로自由路를 따라 황해와 섞이면서
이따금 얼음덩이가 깨지는 소리를 지른다
강물에 반쯤 잠긴 하얀 달을
우右로 돌아 천천히 가고 있다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를 사각사각 쓴다
『흑백으로 그려보는 강, 그 센티멘탈리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인‘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는 일찍이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곤 했는데“데생이야말로 최고의 학예이며, 인간 정신의 기술(技術)이다.”라고 했다. 흰 종이 위에 4B연필로 명암을 표현하여 흑백으로 소묘가 아닌, 시를 쓰는 것은 어떠할까? 이솔 시인이 흑백으로 소묘한 강, 그 연필 끝을 주목해 본다.
첫 연은, 연필심이 투명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시인과 강이 대치하고 있는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검은 연필심은 우리 마음에 오직 흑백으로 스케치해 간다. 유리창 안 여백에‘하얀 카페’를 그린다. 마음을 여는 나눔의 그릇 커피잔 속으로 설탕이 사르르 녹을 때 우리의 마음도 서로에게 녹아든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시인과 시인, 침묵이 그 여백을 메운다.
“말 없는 말들 커피잔 파문에 감기며 저녁 해를 끌고 가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강에 머잖아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연필이 노을에 물들어가는 마음을 다 그려 넣기까지는 말이 없다. 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쉼 없이 바다로 강물을 떠나보내며 '흐른다는 것의 의미’를 시로 써왔다.
창밖의 강물의 시를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에도 강이 흐른다.‘통유리창 밖으로 흐르는’강물에 연필심이 스치자 강물은 흐릿하게 저녁을 예비하고 있다. 한길 밖에 안 되는 우리는 흐린 강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에 “굵은 빗줄기가 강물을 두드려”주기를 청한다. 흑백으로 그리는 빗줄기소리가 강물을 두드리면“강물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2연에 이르자 닳은 연필심을 깎아 시를 쓰는 풍경이 그려진다. 향나무 연필향을 맡으며 종이 위에 사각사각 내리는 글발을 스케치할 수 있는 것은, 말없이도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연필만이 그려낼 수 있는 흑과 백의 조화이다.
‘자유로自由路를 따라 황해와 섞이’는 강이라면 그 강은 한반도 허리춤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한강이리라. 강물도 살을 에는 아픔을 견디어가며 얼었던 제살이 황해의 바닷물에 깨질 때, 속살이 아려와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개지는 아픔을 참고 마음을 맑게 해야만 하얀 달을 제 몸에 투영할 수 있다.
강물에 어린 달을 우로 돌아 천천히 가며 강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년을 한결 같은 하모니로 흐르는 저 강처럼 우리에게는 서로의 호흡을 고르며 음색이 튀지 않고 조화롭게“함께 부르고 싶은”못 다한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흑백 연필심이 다 닳기 전 그 노랫말을 하얀 종이 위에 사각사각 써내려가야 한다. 그런 후라야 ‘흑백으로 그려보는 강, 그 센티멘탈리즘’의 소묘를 마치고 비로소 연필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