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7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나무들 약속
[김필영 시문학 칼럼](7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나무들 약속
  • 뉴스N제주
  • 승인 2024.01.2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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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황상순 시집, 『문학아카데미 시선』280, 오래된 약속, 21쪽, 나무들 약속

나무들 약속

황 상 순

다시 봄, 은행나무에서
단풍나무에서 산벚나무에서 또 다른 나무들에게서
잊어버리지 않고 솟아나는 나뭇잎들을 보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은행나무는 은행잎을 단풍나무는 단풍잎을 산벚나무는 산벚잎을
또 다른 나무들은
또 다른 나무들의 잎들을 무성히 피워 올려
온 산 가득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은 푸른 강물이 되어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실례지만 댁은 누구세요,
아들의 흙빛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는
이천 박사장 노모의 치매도 슬프고 무섭지만
한 번쯤은 잊을 만도 한데
아차. 하고 한 번쯤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잊는 것보다 잊지 않는 것이
잊지 않는 것보다 잊혀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만큼이나 야속한 것인지
그대와 아무 약속도 한 적 없건만.

뉴스N제주가 주최한 '나의 시 나의 인생' 문학특강 가을편이 19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뉴스N제주 스타디움(제주시 중앙로 253, 5층)에서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를 초대해 특강을 가졌다.
김필영 시인/ 평론가

『자연의 약속보다 소중한 약속의 시학』

만물은 대자연의 순리라는 질서 속에서 무언의 약속을 하며 존재한다. 사람도 약속의 고리로 서로의 관계가 이어진다면 약속은 인연의 동아줄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못하거나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약속’앞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황상순 시인의 시를 통해 약속의 단면을 탐색해본다.

시의 도입부는 봄을 맞은 나무들의 싱그러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은행나무에서 단풍나무에서 산벚나무에서 또 다른 나무들에게서/ 잊어버리지 않고 솟아나는 나뭇잎들을 보았다.”고‘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자연의 질서를 재현해보이고 있다.

“은행나무는 은행잎을 단풍나무는 단풍잎을 산벚나무는 산벚잎을/ 또 다른 나무들은/ 또 다른 나무들의 잎들을 무성히 피워 올려/ 온 산 가득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이 풍경에 대하여‘나무들의 약속’을 사유해본다면, 이 약속은 나뭇잎이 일제히 나무를 떠났던 지난겨울의 약속이 이행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사람에게 모든 약속은 다 중요하나 지켜지는 약속이 더 바람직하기에 일제히 나무를 떠났던 이파리들이 나무와 약속하던 장면이 생략되었다. 다시 봄, 나뭇잎들이 소생하자 “세상은 푸른 강물이 되어 출렁거리기 시작한다.”고 함은 봄을 맞은 이파리들의 생이‘약속이행’으로 인해 나무의 생명이 약동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만남은 끊임없는 약속의 연결을 통해 이어진다. 그 끊임없는 연결고리에 약속이라는 심줄이 인연을 만들어주기에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는 관계가 지속될 때, 약속은 사람의 관계를 발전시킨다. 반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인연의 고리는 약화되고 급기야 인연은 끊어질 수 있다.

시의 중반에 이르러 충적적인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나무들이 약속을 이행하는 대자연의 질서에 경탄하던 독자의 가슴에 송곳 같은 행간이 닻줄처럼 박혀있다. “아들의 흙빛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는”치매 걸린 노모의 입에서 나온“실례지만 댁은 누구세요?”라는 말이 폐부를 찌른다. 부모와 자식의 모든 약속의 효력이 허망하게 정지되는 질문 앞에 지상의 모든 자식들은 말을 잃게 된다.

유년시절부터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무슨 약속을 했는가? 젖을 빨던 우리를 내려다보시던 어머니는‘영원히 사랑한다고, 영원히 곁에 있어주겠다고’말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젖을 빨던 그 가슴에서 뺨으로 전해오는 체온과 눈빛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인 본능으로 약속을 읽었다.

그러나 평생을 살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언제까지나 어머니가 곁에 있어줄 것으로 무관심으로 살다가“실례지만 댁은 누구세요?”라는 말이 송곳으로 가슴에 박히게 되고서야 ‘약속’을 기억해 낸다.

시는 종만으로 치달으며 소름끼치는 고백을 토해낸다. 자식을 몰라보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망각의 슬픔보다 무서운 슬픔을 깨닫게 한다. 그 무서움의 감도는 마지막행이 가까워질수록 짙어진다.

그리고 잊혀진 약속들을 떠올려낸다.“한 번쯤은 잊을 만도 한데 / 아차. 하고 한 번쯤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평생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약속이 한 번도 변함없이 지켜져 왔음을 깨닫게 된다.

평생 약속을 지키다 자식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께 아무런 약속도 다시 할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이 망연자실 무섭고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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