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86)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빈방
[김필영 시문학 칼럼](86)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빈방
  • 뉴스N제주
  • 승인 2024.03.0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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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마경덕 시집, 글로브 중독자(애지시선) 112쪽 : 빈방

빈방

마경덕

우묵한 집,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누가 살다 갔나. 오래된 적막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한 줌의 고요, 한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있다. 조심조심 바다 밑을 더듬으면

불쑥 목을 죄는 문어의 흡반, 불가사리에 쫓겨 참았던 숨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글뽀글 물갈피에 쓴 일기장을 넘기면 ...

빗장을 지른, 파도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방, 철썩 문 두드리는 소리에 허리 접힌 불안한 잠이 있고, 파도가 키운 둥근 나이테가 있고 부우― 부우―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 떨리는 어깨와 부르튼 입술도 있다. 모자반 숲 파래숲 울창한 미역숲이 넘실대고 프렌치호른에 부르르 바다가 젖고 밤바다의 비늘이 반짝이고

외로운 나팔수가 살던 방, 문짝마저 떨어져 나간 소라 껍데기, 잠시 세들었던 집게마저 떠난 집,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무엇을 기다리나.

모래밭 적막한 방 한칸

뉴스N제주가 주최한 '나의 시 나의 인생' 문학특강 가을편이 19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뉴스N제주 스타디움(제주시 중앙로 253, 5층)에서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를 초대해 특강을 가졌다.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

 

『소라껍질,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폐허』

르네상스 문명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돌아온 한 시인은 한동안 시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의 그 웅장한 콜로세움도 인간의 욕망의 잔해로 폐허되어 산화되고 있는 모습에서 시인은 사유의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한 시인이 바닷가에서 주운 빈 소라껍질을 집어 들었다.

속살이 빠져나간 빈 조개껍데기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시로 탄생된다. 웅장한 콜로세움과 빈 소라껍질, 두 폐허의 모습에서 인간문명의 폐허와 자연의 폐허는 어떻게 다른가. 마경덕의 시 속으로 들어가 그 이면을 살펴본다.

시의 첫 행은 소라껍질의 “우묵한 집, 좁은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그 매끈거리는 살빛 속살을 안았을 소라의 방을 소개하고 있다. “누가 살다 갔나”라는 자문을 던지므로 독자를 지나간 시간 속 ‘빈 집’, ‘빈방’으로 초대한다.

무채색으로 잠들었던 ‘빈집’ 배경과 주인공들을 불러들이려면 ‘뽀글뽀글 물갈피에 일기장’을 조심조심 더듬어 넘겨야 한다. 오래된 적막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는 방, “한 줌의 고요, 한줌의 마른 파도가 주홍빛 벽에 걸려있”는 방이다.

“조심조심 바다 밑을 더듬으면/ 불쑥 목을 죄는 문어의 흡반, 불가사리에 쫓겨 참았던 숨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뽀글뽀글 물갈피에 쓴 일기장을 넘기면”바닷가가 고향인 마음속에 빈집 하나씩은 갖고 사는 우리들의 옛집이 떠오른다.

우리를 존재하게 한 집, 홀어머니가 살다 가신 집, 대문 송판 옹이가 빠져나간 틈으로 들여다뵈는 빈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린 적이 있다. 시인인 화자도 어쩌면 고향집을 찾아갔다가 빈집 앞에서 서성이다 마음을 달래려고 바닷가를 거닐다가 소라껍질을 주웠을지 모른다. 빈 소라껍질을 관념적으로 사유했다면 소라껍질은 콜로세움처럼 폐허의 잔재로 남아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2연은 “빗장을 지른, 파도 한 방울 스미지 않는 방”이 소개된다. 소라의 속살을 덮었던 얇은 막이 있어, 파도에도 물 한 방울 새어들지 않은 집이었으리라.

넉넉하지 못했을 지라도 엄격하나 속 깊으신 아버지, 자상하고 희생적인 어머니, 티격태격해도 미움 없는 마음으로 도란거리는 형제들이 살아가던 집, 모깃불 피우고 멍석에 함께 누우면, “파도가 키운 둥근 나이테가 있고 부우― 부우―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가 “모자반 숲 파래숲 울창한 미역숲” 내음을 싣고 불어왔을 것이다.

별빛 내리는 밤하늘이 “밤바다의 비늘”처럼 반짝였을 것이다. 소녀의 설렘이 “떨리는 어깨와 부르튼 입술”에“프렌치호른에 부르르” 젖었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손에 들었던 ‘소라 껍질’을 책장 위에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속‘빈집’을 나와야 한다. 그 빈집엔 ‘외로운 나팔수’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무엇을 기다리’는 소라껍질처럼 우리는 암울한 세상에서 생生을 계수하며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선형 골방에 깊숙한 곳에 모래알 같은 자식을 여린 살로 안아 길러 바다로 내보내고 껍질만 남은 빈 소라껍질, 소라의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었음을 빈 소라껍질을 통해 본다. 관념이 아닌, 사물의 이면을 바라봐준 시인이 있기에, 우리의 마음속에 울창한 미역숲이 넘실대는 바닷가, 저음으로 가라앉은 호른소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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