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87) 고구려 왕 이야기(2)
[장영주 칼럼](87) 고구려 왕 이야기(2)
  • 뉴스N제주
  • 승인 2023.03.27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85회 이전 칼럼에서는 고구려 3대 왕까지 부여와 관련된 스토리를 연결했는데, 여기서 잠깐 고구려 전체 왕조 족계를 정리한 다음 4대 왕 스토리부터 이어 나가려 한다(1대∼3대 약술 후).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세워져서 668년 멸망했다.

○ 1대 동명성왕(고주몽)(BC37-BC19) 고구려 건국

고구려 건국 시조 고주몽 이야기, 유화 품 안에 햇빛이 비쳐들어 이로 인해서 임신하게 되었는데 신작 4년 계해(기원전 58년) 4월 주몽을 낳았다. 주몽은 울음소리가 대단히 우렁차고 골격과 풍채가 뛰어나고 기이하였다.

태어날 때 왼편 겨드랑이에서 알이 나왔는데 금와왕이 괴이한 일로 생각하여 사람이 새의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시켜 마구간에 가져다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말들이 그를 밟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깊은 산 속에 가져다 버리라 했다. 그랬더니 온갖 짐승들이 모두 그를 보호하였다. 흐린 날에도 알에는 항상 햇빛이 비치었다.

그제야 왕은 그 알을 가져다가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어 기르게 하였다. 알은 마침내 터지어 그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파리 떼들이 눈에 와 붙어 잘 수가 없사오니 어머님께서는 활과 화살을 하나 만들어 주소서.” 하였다. 어머니가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더니 그는 혼자서 물레 위에 앉은 파리들을 쏘아 맞히였다. 그래서 후에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 2대 유리명왕(BC19-AD18) 국내성으로 천도

아버지 주몽이 남긴 징표인 부러진 칼을 찾아 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곧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은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에 느껴 ‘황조가’를 지었다고 한다.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이 시가는 일반적으로 유리왕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로 본다.

○ 3대 대무신왕(18-44)

원년(서기 18년) 대무신왕이 즉위했다. 이름은 무휼로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영웅호걸스럽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4대 민중왕(44-48)
5대 모본왕(48-53)
6대 태조대왕(53-146) 중앙집권 체제 정비, 왕위세습 확립, 고대 국가 완성
7대 차대왕(146-165)
8대 신대왕(165-179)
9대 고국천왕(179-197)
10대 산상왕(197-229)
11대 동천왕(229-247)
12대 중천왕(247-270)
13대 서천왕(270-292)
14대 봉상왕(292-300)
15대 미천왕(300-330)
16대 고국원왕(330-371)
17대 소수림왕(371-384) 태학 설립
18대 고국양왕(384-391)
19대 광개토대왕(391-412) 고구려 전성기 왕
20대 장수왕(412-491) 평양 천도,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를 세운 고구려 전성기 왕
21대 문자명왕(491-519) 부여를 멸망
22대 안장왕(519-531)
23대 안원왕(531-545) 이 시기에 가락국 멸망
24대 양원왕(545-559)
25대 평원왕(559-590)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 이 시기 인물
26대 영양왕(590-618)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27대 영류왕(618-642) 천리장성 쌓기 시작
28대 보장왕(642-668) 고구려의 마지막 왕

◇고구려 4대 민중왕 스토리

대무신왕 27년 한나라를 재통일한 후 한 광무제가 낙랑군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일전을 벌였는데 이 와중에 왕이 죽었다. 왕이 죽자 호동왕자를 죽게 하고 아들을 세우려던 첫째 왕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무신왕의 동생이 즉위하니 그가 민중왕(44-48)이다. 민중왕은 5년 동안 민중원이라는 곳에서 사냥만 하다가 죽었기에 시호도 민중왕이 되었다.

◇고구려 5대 모본왕 스토리

위키백과 사전에 의하면, 민중왕 사후 즉위했으나 성격이 포악해서 원망을 많이 샀으며 결국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49년 후한의 요동태수 채융과 화친하였는데, 이 시기에 폭풍이 불고 여름에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다. 51년 날로 포악해져 가는 모본왕은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아 누웠으며 혹시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서 충언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 53년 결국 모본왕은 신하 두로에게 살해당했다.

◇고구려 6대 태조왕 스토리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 때에 와서부터 실질적으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국조왕·태조대왕이라고도 했다. 모본왕이 살해된 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요서에 10성을 쌓아 후한의 침입에 대비했다.

태조왕은 모본왕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본 까닭에 좋은 정치를 하여 백성들이 마음 놓고 잘 살도록 하였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나라를 넓혀 갈 수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혁신 정치를 펴나갔으나 한인과 싸움은 더욱 잦았다.

한의 풍환과 요광이 고구려의 임북쪽 국경으로 쳐들어와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던 예맥의 금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가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이에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그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수성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 풍환과 요광의 많은 군사를 맞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리는 싸울 것 없이 큰 나라의 명령을 듣겠습니다.”

이에 요광과 풍환은 좋은 말이라 하여 전쟁을 중지하였다.

‘흠, 내 계획대로 되는군.’

수성은 자기의 계획대로 되는 것을 보고 채풍과 요광의 군사를 험한 산골짜기로 유인한 다음 3천의 군사로 현도군과 요동군의 본거지를 습격하였다.

군사가 별로 없는 요동과 현도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오니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이곳이 적의 소굴이다. 함락시켜라.”

고구려 군사들은 한나라 사람을 포로로 잡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나라에서는 요동군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의 군사 3천여 명을 보내 요동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고구려의 군대가 물러간 후였으므로 싸움도 못 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을 때 태조왕은 다시 수성을 시켜 선비족 8천 명을 데리고 요동 태수 채풍을 사로잡고자 포위하게 하였다.

드디어 수성과 채풍이 맞붙게 되었다.

수성은 큰 소리로 호령하며 쳐들어가 채풍의 머리를 베고, 그의 막료인 경모, 용단, 공손포 등도 한 칼에 베었다.

요동에서 크게 이긴 후 다시 부여국으로 돌아온 수성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차차 권력도 잡게 되니 양신이 슬그머니 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무신왕께서도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를 아우 되시는 민중왕에게 양위한 일이 있고, 모본왕이 돌아가신 뒤에는 왕자 재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재사는 자기가 이미 늙었다고 자기의 아들에게 양위한 일이 있소이다. 지금 대왕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으니 왕제인 수성 대감께서 양위 받으셔야만 할 것이옵니다.”

수성은 귀가 솔깃했다.

“왕위는 큰아들이 물려받는 법이오. 지금 대왕은 이미 늙었지만, 태자가 있으니 태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할 것이오.”

수성은 사양하는 체하였다.

“아니옵니다. 예전부터 아우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일이 많사옵니다.”

양신은 옛날에 있었던 일까지 들먹이며 수성을 추앙하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신 어른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나랏일이 바로 될 것이옵니다.”

“허허, 아직 왕이 살아계신 데 어찌하겠소.”

이후 수성이 임금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수성 황제가 왕위를 차지하려는 나쁜 생각하고 있으니 멀리하심이 좋을 줄 아옵니다.”

좌보 목도루가 태조왕에게 아뢰었다.

“수성이 어찌하겠소. 너무 염려하지 말라”

태조왕은 목도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왕은 나이가 100살이 넘었어도 죽지 않으니 걱정이고, 내 나이 이미 70이 넘었으니 이제는 더 기다릴 수 없다.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수성이 어느 날 충신들을 불러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유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처리하다니?”

“임금을 내쫓는 수밖에 없지요.”

“그야 될 말인가?”

“그러면 스스로 양위하도록 하지요.”

이때 젊은이가 일어나서 수성의 행위를 꾸짖었다.

“대감께서 옳지 않은 일을 하여도 말리지 않고, 아첨하는 무리와 같이 행동하시면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수성과 미유 등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100살이 넘어도 양위를 안 하는데 언제 양위하기를 바란다는 말이오. 대궐로 가서 강제로라도 양위를 하도록 하여야 하겠소.”

수성은 대궐로 들어갔다.

어전에는 고복장만이 홀로 임금을 모시고 있었다.

수성과 그의 부하들은 어전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무례하게 이전까지 올라오니 반역을 할 셈인가?”

고복장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오. 대왕께 아뢴 말씀이 있어서 황제를 모시고 온 것이오.”

“그러면 거기서 아뢸 것이지 어디를 함부로 올라오는 것인가?”

이에 모두 물러나고 수성 왕제 한 사람만이 어전으로 올라왔다.

고복장이 태조왕에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수성이 상감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목을 쳐서 뒷일을 바로잡도록 하옵소서.”

왕은 묵묵히 앉아 있다가

“형제간에 무슨 반란이 있겠소. 내 이제 왕위를 물려 주려 하오.”

“황공하옵신 분부를 거두소서. 양위하시려면 마땅히 태자께 하셔야 하옵니다. 수성 황제는 왕위를 이어받을 인물이 되지 못하옵니다. 거듭 살피옵소서.”

“내 이미 나이 많으니 수성에게 양위하겠노라.”

왕의 말을 듣고 수성은 즉시 미유에게 양위의 조서를 쓰게 하였다.

미유는 기뻐하며 조서를 썼다.

“과인이 이미 늙어 나랏일을 보살피기가 어렵게 되었다. 수성 황제는 과인을 도와 안으로는 정사를 보살펴 왔고, 밖으로는 군사를 맡아 종묘사직에 큰 공을 세웠으니 즉위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