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4) 고구려 왕 이야기(9)
[장영주 칼럼](94) 고구려 왕 이야기(9)
  • 뉴스N제주
  • 승인 2023.08.1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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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 봉상왕

봉상왕은 고구려 제14대 왕(292년–300년 재위) 서천왕의 첫째아들로 이름은 상부 또는 삽시루라 불렀다.

주) 역대 고구려 왕들의 본명을 알아봅니다. 두세 개의 이름을 가졌어도 하나만 올렸습니다. 출처 다음 커뮤니케이션

추모성왕(주몽) 유리명왕(유리) 대무신왕(무휼) 민중왕(해색주) 모본왕(해우) 태조왕(궁) 차대왕(수성) 신대왕(백고) 고국천왕(남무) 산상왕(연우) 동천왕(우위거) 중천왕(연불) 서천왕(약로) 봉상왕(상부) 미천왕(을불) 고국원왕(사유) 소수림왕(구부) 고국양왕(이련) 광개토태왕(담덕) 장수왕(거련) 문자명왕(라운) 안장왕(흥안) 안원왕(보연) 양원왕(평성) 평원왕(양성) 영양왕(원) 영류왕(건무) 보장왕(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봉상왕은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서천왕의 아들로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았다. 왕위에 오르자 곧 왕권 강화에 주력, 만주·연해주 등 고대 동아시아에 살았던 퉁구스계 민족 숙신을 격파해 존경을 받고 있던 아버지의 동생 작은아버지 달가를 죽이고, 이듬해 봉상왕 2년(293)에는 피신해 있던 동생 돌고(고돌고)를 의심하여 죽였다. 

이는 고구려의 왕위계승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왕권확립을 위하여 왕제(王弟)들이 제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돌고의 아들 을불(乙佛)은 몸을 숨기고 있다가 봉상왕이 폐위된 뒤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천왕이다(고구려 제15대 왕).

이렇듯 봉상왕은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였고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계속된 흉년에도 불구하고 298년과 300년에 궁실을 대규모로 증축하였다.

293년과 296년 모용외군의 침략을 받았는데, 293년에는 신성재(新城宰)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의 활약으로 이들을 격퇴했다고 하는데 확실성은 없는 형편이다.

300년에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가운데 왕이 궁실을 수리하려고 백성을 징발하려 하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부당함을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국상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과 왕을 폐위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은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자살한 뒤 봉산원(烽山原)에 묻혔다.

● 야화 한마당

삼국사기에 전하기를,

봉상왕 5년(296)에 침략군(모용씨 군대)이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릉을 도굴하려다가 무덤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자 두렵고 놀란 모용씨 군사들이  스스로 철수했다는 야화가 전하기도 한다.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復言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 않길 바란다.

폭정을 그만두라는 창조리의 간언에 웃으며 봉상왕이 한 말이라고 《삼국사기》에는 전한다.

창조리는 여러 신하와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압록강에서 소금장수였다던 고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한다. 봉상(원)이라는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 봉상왕이라 하였다 한다.

●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고구려 왕 수난사

모본왕은 성품이 포악하고 폭군이며 두로에게 살해당한다.

차대왕은 횡포가 심하고 자신의 맘대로 행동 즉위 20년에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한다.

봉상왕은 나라가 계속된 흉년에 사정이 좋지 않았으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동생의 간언을 무시하고 동생을 살해한다 국상 창조리의해 폐위되고 자결한다.

고국천왕은 평양성전투에서 백제 근수태자 활에 죽는다.

영류왕은 연개소문하고 뜻이달라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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