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0) 고구려 왕 이야기(5)
[장영주 칼럼](90) 고구려 왕 이야기(5)
  • 뉴스N제주
  • 승인 2023.06.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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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 제10대 임금 산상왕(197~227)

산상왕이 왕위에 오른지 오래 되었으나 왕자가 없었다.

왕과 왕비는 높은 산과 깊은 강을 찾아다니며 왕자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왕은 신하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을 때 마침 산돼지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갔다.

왕은 활을 쏘았으나 산돼지는 달아났다.

왕은 신하들과 같이 산돼지를 쫓아 ‘주봉촌’이라는 곳까지 갔다.

왕은 산돼지가 달아난 주봉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웬사람들이 달아났던 산돼지를 잡아 왔다.

왕은 어디서 잡았느냐고 물었다.

“대왕께서 산돼지를 쫓아 이 고개로 넘어오실 때, 한 여자가 달아나는 돼지의 발을 밟으니 돼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잡히더라고 하옵니다.”

“허어, 이상스러운 일이로구나.”

왕은 잡지 못한 산돼지를 맨손으로 잡았다는 여자가 궁금했다.

산상왕은 산돼지를 잡은 여자의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 후 여자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났으니 이가 고구려 제11대 임금 동천왕이다(후궁으로 삼았다는 설화는 다음 제11대 동천왕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 제11대왕 동천왕(227~248)

삼국사기 원문을 풀어 쓴 다음 백과(국사편찬위원회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원년(서기 227년) 동천왕(어렸을 때 교체라고 불리었다) 왕후(모친)는 주봉촌 사람(앞 이야기에서 돼지를 발로 밟아 잡은 사람)으로 입궁하고는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다.

교체는 선왕(산상왕) 17년 태자가 되었고 후사를 이어 즉위(동천왕)했다.

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어질었는데 왕후가 왕의 심성을 시험해 보려고 왕이 유관하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끊었는데 왕이 돌아와 말하길,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엽도다!”

라 했다한다.

또 시종이 수라를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었으나 역시 화내지 않았다.

2년(서기 228년) 2월 왕이 졸본으로 가 시조 사당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했다.

3월 우 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4년(서기 230년) 국상 고우루가 죽고 우태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8년(서기 234년) 위나라 사신을 파견해 화친했다. 9월 왕태후 우 씨가 죽었다.

왕태후가 임종 때 말하길,

“소첩의 행실이 도의에 어긋났으니 장차 어떠한 면목으로 땅에 묻혀 국양을 뵙겠는가? 만약 군신들이 차마 구렁에 떨구기가 어렵다면 청하건대 산상왕릉 옆에 나를 장사 지내어 달라.” 마침내 왕태후는 말대로 산상왕릉 옆에 장사를 지냈다.

무당이 말하길,

“국양왕이 내려와 저에게 말씀하시길 <어제 우 씨가 산상왕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에 이기지 못해 끝내 우 씨와 말다툼을 했다. 돌아와서 생각해 봐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보기 힘드니 너는 조정에 이를 고해 물건으로 나의 무덤을 가려달라고 하여라.> 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능 앞에 7겹의 소나무를 심었다한다.

10년(서기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을 통하려 했으나 왕이 그 사신을 억류하고 가을 7월에 이르러서는 목을 베고 수급을 위나라로 보냈다.

11년(서기 237년) 위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연호를 바꾼 것을 하례했다. 이때가 경초 원년이다.

12년(서기 238년)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사마의)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손연 토벌하니 왕우 주부와 대가들을 보내 병 1천을 거느리고 가서 도와주게 했다.

16년(서기 242년) 왕이 장병들을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해 격파했다.

17년(서기 243년) 왕자 연불(중천왕)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령을 내렸다.

19년(서기 245년) 3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고 왕이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10월 군사를 출병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했다.

20년(서기 246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현도에서 출병해 침입해 왔다. 왕이 보병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강가에서 맞서 싸웠는데, 참수한 수급이 3천여 급이었고 죽이고 노획한 수가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제장들에게 이르길 “위나라 대병이 도리어 우리의 소병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라는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라 들었는데 지금 목숨이 나의 손아귀에 달려있구나!”

곧 영을 내려 철기병 오천을 나아가 공격했다.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항전으로 맞서 싸우니 아군이 대패해 궤멸되어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1천여 기병으로 압록원으로 도망갔다.

20년(서기 246년)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도륙했다.

곧 장군 왕기​를 보내 왕을 추격했다. 왕이 도주하여 남옥저 죽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흩어져 대부분 죽고 오직 동부 밀우만이 홀로 왕의 곁에 있었다. 왕에게 아뢰길 “지금 추격병이 사납게 닥쳐오니 형세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신이 청하건대 결사항전하며 적을 방어할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십시오.”

마침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들어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왕이 샛길로 행군하여 벗어났고 산골짜기에 의지해 흩어졌던 군사를 취합하고 방비태세를 갖추고 말하기를 “만약 밀우를 데려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 하부 유옥구 앞으로 나와 대답하길 “신을 보내 주십시오.”

마침내 전투지로 가서 밀우가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그를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다리에 눕혔고 오랫동안 있다가 곧 깨어났다. 왕이 이곳저곳 샛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나라 군사들이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다 하고 기세마저 꺾여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아가 말하길 “형세가 심히 위태롭고 다급하나 아무 의미 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소신에게 계책이 있습니다. 청하건대 음식과 고기를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에게 주어 위로하다가 틈을 엿보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약 소신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즉시 왕께서는 힘을 다해 공격해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라기에 왕이 이를 승낙했다.

유유가 위 군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하며 말하길 “우리 군주께서 대국에 죄를 지어 도망쳐서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몸 둘 곳조차 없기에 장차 진지 앞으로 와서 항복을 청하고 사구에 죽음을 맡길 것입니다. 먼저 소신을 보내어 차린 음식이 많지는 않지만 사람을 보내 음식을 올립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를 듣고 장차 그 항복을 받으려 했고 유유가 식기에 칼을 숨기고 앞으로 나가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는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영이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왕이 군사를 세 군데 길로 나누고 재빠르게 습격하니 위나라 군사들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져 진을 갖추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했다.

왕이 나라로 복귀해 공을 논했다. 밀우와 유유를 제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유옥구에게는 압록강 두눌의 강가와 언덕지역을 각각 식읍으로 하사했다. 유유는 구사자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번 전투에 참전한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다가 공을 기록하고 또 환도산에 이르러서는 불내성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돌아갔다.

애초에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공하고 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언했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며 말하길 “이 땅에는 장차 쑥만 자라나 들어서 있는 것만 보일 것이다.” 끝내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영에 명하여 그의 무덤을 파괴하지 말고 무덤 주위의 나무들을 벌목하지 못하게 했으며 포로로 잡은 그의 처자들을 모두 방면했다.

21년(서기 247년)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겪으면서 다시 도읍으로는 불가하여 평양성을 축조하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22년(서기 248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서 화친을 맺었다.

9월 왕이 죽었다. 시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시호는 동천왕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은덕을 생각하며 슬프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근신들은 스스로 자살해 따라 죽으려는 자들이 많았으나 후사를 이은 왕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라 금지시켰다. 장례일에 이르러 왕의 무덤에 이르러 스스로 죽는 자들이 심히 많았다. 나라 사람들은 땔나무를 벌목해 그들의 시신을 덮어주었기에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고구려가 강대한 국가로 발전하기까지는 위기도 있었다. 중국의 위나라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고구려 제11대 왕 동천왕은 압록강 서안평 · 구련성 지방에서 위나라와 싸워 이겼다.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반격을 받고 환도성에서 싸웠으나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 갔다. 유유의 활약으로 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 이야기가 다음호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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