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88) 고구려 왕 이야기(3)
[장영주 칼럼](88) 고구려 왕 이야기(3)
  • 뉴스N제주
  • 승인 2023.04.3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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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 고구려 7대 차대왕

수성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고구려 7대 임금이 차대왕이다.

수성은 왕위에 오른 후 미유를 우보로 정하고, 어지류를 좌보로 정하였으며, 양신에게는 중의 대부 벼슬을 주었다.

차대왕은 자기가 임명한 모든 벼슬아치를 불러 놓고

“모든 일이 나의 뜻대로 이루어졌도다. 이는 그대들이 과인을 위하여 애쓴 덕분이다. 그대들은 계속 과인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

만족한 듯이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차대왕 충신 복장은 자기가 죽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선왕의 가까운 신하로 수성 일파의 흉계를 알고 있었다. 전 임금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 신왕은 왕위에 오른 후, 정치를 제대

로 보살피지 않고 의롭지 못하게 충신을 죽이고 있으니 이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법도를 알지 못하는 임금 밑에서 더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고복장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대왕 2년(147) 고복장이 죽고 나자 차대왕은 점점 거칠고 사나워졌다.

“전왕 시대에 나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한 자는 모조리 없애 버려라!”

이 말에 백성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 왕이 평유들로 사냥 나갔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여우 한 마리가 왕을 바라보며,

“캥캥…….”

하고 울었다.

왕은 기분이 나빴다.

“에잇, 요물이 감히 왕을 놀리는구나. 괘씸한지고.”

왕이 궁에 살을 배겨 쏘았으나 여우는 맞지 않았다.

“캥캥…….”

여우는 계속 캥캥거리다 달아나고 말았다.

“저놈의 여우가…….”

왕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어 여우가 도망간 쪽을 흘겨보면서,

“여우가 울고 가니 좋지 못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한 번 점을 쳐보아라.”

데리고 간 무당에게 말하였다.

옆에 있던 무당은 점을 쳤다.

“대단히 불길한 점괘이옵니다.”

“그러면 무슨 수가 없겠느냐?”

“여우는 자고로 상서롭지 못한 짐승이옵니다. 더구나 흰여우는 하늘이 내려보내시는 것으로 왕이 된 자는 덕을 닦아 나라를 바로잡고 옳은 정치를 펴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옵니다. 대왕께서 지금부터라도 덕을 닦아 옳은 정치를 하신다면 복이 될 것이옵니다.”

무당이 말에 왕은 더욱 기분이 나빴다.

“무엇이라고? 덕을 닦으라고? 흉이든 복이든 말할 것이지 네놈이 요사스럽다.”

왕은 무당을 죽여 버리렷다.

그다음부터는 감히 왕에게 옳은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나라가 어수선할수록 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백성들은 모이기만 하면 난리가 난다느니 홍수가 난다느니 하며 불안스러운 말만 주고받았다.

“머지않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거의 해마다 일식이 일어나는가 하면 월식도 그러니 이것이 변이 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어디 그뿐인가요. 어제저녁에도 별이 남쪽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소?”

이런 불안한 세월이 20년이나 계속되다가 차대왕은 명림답부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나고 차대왕의 동생 백고가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신대왕이다.

신대왕은 왕위에 올라 명림답부의 도움으로 백성들이 잘살도록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 고구려 8대 신대왕

훌륭한 재상 명림답부는 165년에 연나부의 조의로 있으면서 차대왕이 포악한 것을 근 20여 년이나 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를 바로 잡으려면 차대왕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 무지막지한 차대왕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

그는 언제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차대왕 20년 10월 어느 날, 궁중에 들어가 왕이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자는 틈을 타서 왕의 목을 베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명림답부는 태자 추안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태자는 부왕이 변을 당하자 숨어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명림답부는

‘할 수 없구나. 임금의 동생 되는 백고를 임금의 자리에 앉혀야 하겠구나.’

하고 차대왕의 동생 백고를 왕으로 모시니 이분이 바로 신대왕이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야, 이제는 우리도 마음 놓고 살게 되었구나.”

하면서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때 고구려를 노리던 한 나라에서는 기회라고 쳐들어왔다.

태조왕 때 고구려는 요동의 서안 평형을 친 것을 비롯하여 낙랑 대수의 처자까지 포로로 잡아 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복수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이 암살당하고 나라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한나라에서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신대왕 8년에 군사를 보내 쳐들어온 것이다.

신대왕은 신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경들은 말해 보도록 하오.”

신하 한 사람이 나섰다.

“한나라가 우리를 업신여겨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한나라는 우리가 겁이 나서 싸우지 못하는 줄 알고 이후에도 계속 쳐들어올 염려가 있사옵니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악하여 한 사람이 지키면 만 명을 당할 수 있사옵니다. 한나라의 군사가 비록 많다고 해도 죽기를 한하고 싸우면 못 당할 리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즉시 나가 싸워 물리치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사옵니다.”

그러나 명림답부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오. 한의 대군이 지금 쳐들어오고 있으니 당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되오. 또 병법에 군대의 수가 많으면 싸우기 좋고, 적으면 지키기 좋다 하였소. 지금 한인들은 천 리 밖에서 양식을 운반해 와야 하오. 우리가 지키고만 있으면 적은 곧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물러가게 될 것이오. 이때 우리 군사가 치면 힘

안 들이고 승리할 것이오.”

왕도 명림답부의 말을 옳게 여겨 성을 튼튼히 지키기로 하였다.

과연 명림답부의 말대로 적은 처음에는 맹렬히 공격했으나 두 달이 지나자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기다리던 명림답부는 강한 군사를 이끌고 적의 뒤를 공격하였다.

굶주린 한나라 군사들은 별안간 공격해 오는 날쌘 고구려 군사들을 당할 수가 없어 전멸당하고 말았다.

싸움에 이긴 고구려는 온 나라가 기쁨에 들떠 있었다.

“명림답부가 아니었다면 우리 고구려는 이렇게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명림답부를 칭찬하였다.

“과인이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오직 국상의 충성 때문이었는데 이번에 또 적군을 물리쳐 나라를 편하게 하였으니 경은 고구려에서 제일가는 충신이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손을 잡고 그의 공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 후 명림답부는 113살까지 살다가 1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질산에 묻혔고, 나라에서는 수십 명의 군사가 그의 묘를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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