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6) 고구려 왕 이야기(11)...제16대 고국원왕(재위 기간 331년 2월 ~ 371년 10월 23일 40년 8개월)
[장영주 칼럼](96) 고구려 왕 이야기(11)...제16대 고국원왕(재위 기간 331년 2월 ~ 371년 10월 23일 40년 8개월)
  • 뉴스N제주
  • 승인 2023.12.2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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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그림과 함께 하는 한국왕조설화 고구려  고국원왕 편
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주) AI 시대에 한국왕조설화도 이에 발맞춰 새로운 기획을 하고 있다. 최대한 글 내용에 맞게 그림을 그려라 명(그려줘!) 했지만 사실 AI는 서양 프로그램이라 동양적 사고로 고구려 장수, 병사, 성을 그리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란 기대로 여기서라도 계속 고구려 환경을 올리므로 AI가 인지하는 정보를 갖게 노력하고자 한다.

때는 339년, 고국원왕은 전연과 직접 싸우기보다는 일단은 동맹을 요청하였다.

때는 340년, 태자를 전연에 보내 조회하는 방식으로 온건책을 폈다.

잠깐, 전연이란?

오호십육국 시대에 선비족의 모용부가 세운 국가로 실제 국호는 연이고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훗날 전연을 부활시킨 후연과 구분하기 위해 앞 전자를 붙여 전연, 북연이라 한다.

요서를 근거지로 발흥하여 모용외 재위 때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모용황 때는 칭제 건원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을 틈타 중원 동부 관동을 차지할 정도로 강대국으로 거듭나 화북 통일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고국원왕 때 고구려에 쳐들어와 환도성을 털고, 미천왕의 능을 도굴하며,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 등 온갖 사고는 다 쳐서 고구려를 패배시킨 숙적으로 유명하다. 고구려는 미천왕의 시신과 고국원왕의 어머니가 고구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연에 조공을 바쳤으나 모용황은 미천왕의 시신만 돌려보냈다. 오랫동안 조공을 바친 뒤에야 모용준에 의해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데려올 수 있었다. 다만 고국원왕의 군사적 실력이 명백히 광개토대왕에게 미치진 못했고 광개토대왕의 그 고구려보다도 고국원왕의 고구려가 행정, 군사, 문화, 경제 모든 부분이 확연히 열세긴 하였으나, 이 시기 전연의 인구압이 높은 수준을 감안하면 선방한 부분도 있다 하겠다.(여기서 말하는 태자가 소수림왕인지 고국양왕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이러한 고구려의 친선 의도에 전연은 도리어 창칼로 응답하였다.

때는 342년, 전연은 55,000명의 대군을 조직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 침공의 의도는 입위장군 모용한이 전연 황제 모용황에게 올린 발언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고구려와 우문선비를 먼저 멸망시켜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전연에서 고구려로 가는 길은 북쪽의 평탄한 길과 남쪽의 험한 길, 둘이 있었는데 고국원왕은 정예병 50,000명을 북쪽, 약한 병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도록 하였으나 모용황은 허를 제대로 찔러 주력 부대 40,000명을 남쪽, 그 외 15,000명을 북쪽으로 보내 양동 작전을 펴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다행히 북쪽 길에서 방어하고 있던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의 50,000명은 건재해 모용황이 이걸 걱정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 고국원왕 본인까지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미천왕의 왕릉이 도굴당하고, 살아있던 태후인 왕후 주 씨와 왕비를 비롯한 50,000명의 포로가 전연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를 볼모로 내놓게 된 고국원왕은 한을 삼키는 나날을 보내었다.

때는 343년 2월, 1,000여 가지의 보물을 바치면서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겨우 돌려받게 되었다.

때는 345년, 남소성을 전연이 빼앗아 갔지만 조치하지 않았고, 모후 주 씨 또한 10여 년이 흐른 모용준 때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로 송환한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오게 된다.

전연은 고구려의 성을 침공하는 등 이후에도 고구려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지배층의 분열로 이어졌다.

때는 370년, 전연은 부견의 전진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당했는데, 당시 전연의 모용씨 황족 일부가 망명해오자 그대로 묶어 전진에 갖다 바치며 수십 년 묵은 복수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

때는 371년 10월, 3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남쪽의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고국원왕은 친히 나가서 장수들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근초고왕과 전투를 벌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상처가 심해져 10월 23일에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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