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3) 고구려 왕 이야기(8)
[장영주 칼럼](93) 고구려 왕 이야기(8)
  • 뉴스N제주
  • 승인 2023.07.18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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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 서천왕

삼국사기 원문 읽기, 고구려 본기와 기타 자료를 덧붙여 보면, 고구려 제13대 왕 서천왕은, 출생(미상) 사망92(서천왕 23) 재위(270년~292년) 서양왕이라고 하며 이름은 약로 또는 약우, 사후 서천지원에 묻혔다.

255년(중천왕 8) 태자로 책봉되다.

270년 12월 중천왕이 죽자 즉위했다.

271년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그해 국상 음우가 죽자 그의 아들인 상루를 국상에 임명했다(아래 야화 참고).

276년 4월 신성에 행차했다가 그해 8월에 돌아왔다.

주) 신성은 오늘날의 중국 푸순 부근에 있었던 고이산성으로, 모용외의 세력을 막아내는 데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고구려의 서북쪽 국경지대였다. 신성의 위치가 이처럼 중요했기 때문에 당시 왕은 국경 수비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에 행차했다.

280년 숙신이 침입해 변방의 주민을 살해하자, 동생 달가를 보내 격퇴했다. 이어서 왕은 숙신의 600여 호를 지금의 눙안 지역 부근 부여 남쪽의 오천에 이주시키고, 주변의 숙신부락 6~7개소를 부용민으로 삼았다. 아울러 그 전공으로 달가를 안국군에 봉하고, 군사 관계의 일을 관장하게 함과 동시에 숙신의 여러 부락을 다스리게 했다.

286년에는 동생 일우와 소발이 역모를 꾸미자 그들을 처형했다. 죽은 뒤 서천지원에 장사지냈다.

● 야화 한마당

서천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서 국상 음우가 병상에 눕게 됐다.

서천왕은 걱정되어 음우 집으로 찾아갔다.

음우는 왕이 친히 병문안을 왔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자리에 앉을 기력조차 없었다.

서천왕은 음우를 만류했다.

“일어설 것 없소. 국상이 이리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짐의 걱정이 매우 크오.”

“폐하, 저는 이제 수명이 다한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곧 일어나실 거요.”

서천왕도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당분간 그대의 자리를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겠소? 짐의 생각으로는 명림홀도가 어떨까 하오만.”

음우가 고개를 저었다.

“명림홀도는 공명심이 크고 침착하지 못해서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그렇다면 내 아우 일우나 소발은 어떻소?”

“그들은 폐하께 해를 끼칠 테니 경계하십시오.”

“그럼 누구에게 국상의 중책을 맡기는 게 좋겠소?”

“대사자 우수가 좋을 듯합니다. 그는 인의와 예를 아는 자로서 만인을 통솔할 만한 인재입니다.”

“외척이라 염려되는구려.”

“우수는 현명하면서도 강직한 사람입니다. 우수가 국상이 되면 외척이 조심하실 겁니다.”

얼마 후 서천왕은 음우의 추천을 받아 우수를 불러 국상으로 임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우수는 거절했다.

“외척이 정사를 맡는 것은 임금과 백성을 위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국왕이 몇 번을 권해도 우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음우가 세상을 떠났다.

백성들은 음우의 덕을 기리기 위해 길가에 나와 통곡했다.

서천왕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도록 명하고 장례가 끝나고 난 후 다시 우수를 청하여 국상 자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되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국사를 맡기는 게 좋겠소?”

“음우의 아들 상루가 아비에게서 보고 배운 바가 있어서 예를 알고 덕망이 있습니다.”

이에 서천왕은 왕은 상루에게 국상을 맡겼다.

상루가 국상이 되자 명림홀도는 분노와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명림홀도는 국상이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서천왕은 상루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고 백성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다.

서천왕이 선정을 베풀자 고구려 백성은 입을 모아 임금의 덕을 찬양했다.

기록에 의하면, 서천왕은 온천을 사랑했다 한다. 여기서 온천은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지하수가 지열에 의하여 평균 기온 이상으로 데워져 지표로 용출되는 샘으로 온수의 용출은 단층이나 절리(화성암에서 보이는 규칙적인 틈새)와 같은 틈새(깨져서 난 틈)를 따라 지하 깊은 곳에서 상승하여 지표에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것은 직접 지표에 솟아 나오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얕은 곳의 투수성 지층 내에 수평적으로 유통하여 단층·열하·투수성 지층 및 이를 포함하는 지질구조선에서 솟아 나오는 예도 있다.

주) 온천(溫泉)에 대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서천왕(서기 286년경) 『동사강목』에 ‘아우가 온천욕을 하였다.’라는 기록이 최초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대왕과 현종, 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왕들이 ‘온천’을 통해 지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 온천 상위 10위(2020년 기준) 이용자 수로로 매김(출처 한국온천협회)

1. 충청남도 온양
2. 경상남도 부곡
3. 부산광역시 동래
4. 충청남도 덕산
5. 충청북도 수안보
6. 대전광역시 유성
7. 부산광역시 해운대
8. 경상북도 보문
9. 경상남도 김해
10. 충청남도 도고

● 도산온천의 유래

옛날 노파가 자식이 중병에 처해 용두산 영산정에서 여러날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 꿈속에 산신령이 현몽하여 산 밑의 온수를 찾아 자식을 치료하면 났는다고 알려주었다. 

실제 그 물을 먹이고 목욕을 시켰더니 병이 완치되었다. 이후 고마운 마음에 따뜻한 ‘온’자, 은혜 ‘혜’자를 붙여서 ‘온혜’라는 지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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