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5) 고구려 왕 이야기(10)...제15대 미천왕(재위 기간 300~331년)
[장영주 칼럼](95) 고구려 왕 이야기(10)...제15대 미천왕(재위 기간 300~331년)
  • 뉴스N제주
  • 승인 2023.09.17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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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영토 확장 및 왕권 안정화로 고구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 고구려 전성기의 뿌리를 마련한 명군이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予野人, 非王孫也。請更審之。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창조리의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말이다.

훗날 미천왕이 되는 을불은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아들로서 고위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292년 3월 백부 봉상왕이 왕권 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면서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된다. 즉위 직후 숙신을 격파하며 영웅으로 떠오른 숙부 안국군 달가를 반역으로 몰아 처형함에 이어, 이듬해 9월에는 친동생인 돌고까지 숙청해버렸고 이 때문에 드라마틱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한편 봉상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폭정이 심화하였다. 지진과 서리, 우박, 가뭄 등이 잇달아 일어나며 흉년이 지속하고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지만, 봉상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실을 더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짓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여러 신하가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음에도 왕은 따르지 않았고, 국고는 더욱더 바닥나고 있었다.

창조리가 간언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살길을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몰아서 토목공사로 고달프게 하시니, 만백성의 부모가 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다면 충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에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바랍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300년) 8월 조에

300년 8월 봉상왕은 궁궐을 수리하기 위해 온 나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15세가 넘는 이들을 징발하였는데, 당시 백성들은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에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헤아리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여 궁궐 수리를 그만둘 것을 간하였지만, 봉상왕은 창조리가 자신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는 것이냐며 무시했다. 그런데도 창조리가 뜻을 굽히지 않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은가"라고 답하며 오히려 목숨을 위협했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 등을 보내 산과 들을 물색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비류강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나이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용모는 초췌했지만,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위하려고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국상이 저희를 보내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가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을분은 소우 등을 따라나서매,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오맥 남쪽 집에 모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원년(300년) 8월 조에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을 알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물러 나와 여러 신하와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조불과 소우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산과 들을 물색해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하자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도 같이 사냥터에 갔다.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 하여라"라고 말한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갈댓잎을 꽂았는데, 이에 모든 신하가 그를 따라 했다.

민심이 자신의 편임을 알게 된 창조리는 함께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모셔다가 옥새와 인수를 바치어 즉위하게 했다. 봉상왕은 얼마 후 병사들로 포위된 감옥에서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살하고 만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고구려 미천왕에 관한 전설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 미천왕조에 전한다. 봉상왕의 동생 고돌고의 아들 고을불이 왕의 화를 피해 방랑의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다가 후에 국상 창조리 등의 영접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설화이다. 방랑 중이었던 일을 보면 어느 마을 부잣집(음모) 머슴살이를 하던 중 주인이 맹꽁이(개구리로 표현한다) 울음소리가 듣기 싫다 하여 밤새도록 연못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고 그 집을 나와 소금장수를 할 때는 누명을 쓰고 관가에서 매를 얻어맞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얼굴이 여위고 복장이 남루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를 보고도 왕손임을 알지 못하며, 조불과 소우가 그를 발견했을 때 형색은 여위고 파리하였으나 행동거지가 평범하지 않아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생각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자 미천왕이 “나는 야인이요,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살펴보시오.”라고 말했으나 소우의 설득에 소우와 조불은 마침내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 야화 한 마당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수실촌으로 피신하여 신분을 숨기고 음모라는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음모는 을불이 왕족일 그것으로 생각하지 못해 고생만 시킨다.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며 쉬지 못했고, 밤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하니 밤새 연못에 기와나 돌을 던져 개구리 소리를 잠재우며 주인을 위해 일을 해야 안 했다. 그러다 1년 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 소금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을 하게 된다.

소금 장수가 된 이후에도 생활은 매우 어려 웠다. 어느 날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은 뒤 강 동쪽 사수촌에서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 노파는 잠자리 비로 소금 1말을 받고는 더 소금을 달라는 것을 을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었다.

이후 노파는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을불을 쫓아와 가마니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그를 관가에 도둑으로 신고했다. 을불은 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게 되어 소금을 모조리 압수당하고 신발값을 노파에게 주었으나 매를 맞고 온갖 고생을 하다 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꼴에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 한사군(漢四郡)

기원전 108년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쳐 없애고 세운 군현으로 낙랑 ·임둔·현도·진번을 말한다. 한사군의 설치로 한나라가 우리의 영토를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한나라의 발달한 여러 문물이 들어와 후에 낙랑 문화라 일컫는 여러 가지 유물과 옛 무덤을 남겨 그때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나라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고구려의 끊임 없는 욕망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폐합이 있었으며, 끝내는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낙랑군이, 그리고 광개토 대왕 때에는 현도군이 고구려에 병합됨으로써 한사군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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