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84)대무신왕(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왕)
[장영주 칼럼](84)대무신왕(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왕)
  • 뉴스N제주
  • 승인 2023.02.21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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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 임금(재위 18~44)으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추모왕(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무휼이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며 출중한 기상이 있었다.

때는 서기 9년, 부여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

부여 사신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이를 거절하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유리명왕과 대신들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런데 어린 무휼 왕자가 조정에 나가 부여가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부여를 섬기지만, 협박한다면 섬길 수 없다면서 부여의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4년 후,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무휼은 군사를 거느리고 학반형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무휼은 다음 해에 태자로 책봉되고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가 11세에 태자가 되고, 15세인 서기 18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 부여 대소왕은 고구려를 협박하기 위해 사신을 또 보내왔다.

부여 사신은 머리는 하나고 몸은 둘인 붉은 색 까마귀를 고구려에 가져왔다.

까마귀를 선물한 것은 장차 부여가 고구려를 합병할 것이니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의미로 준 것이었다.

하지만 총명한 대무신왕 무휼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부여 사신을 불러들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하여 남방의 색인 붉은 색이 되고, 또 붉은 새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에서 얻어 우리에게 보내니 두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지는 그대도 알 것이다.”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고, 부여를 상징하는 검은색 까마귀가 고구려를 상징하는 붉은색 까마귀가 되었다는 것이니, 이는 장차 부여 땅에 고구려의 깃발이 휘날림을 의미한다고 대무신왕이 해석한 것이다.

사신을 통해 그의 말을 전해 들은 대소왕은 매우 놀랐다.

고구려의 사기를 꺾으려다가 오히려 대무신왕의 총명함에 대소왕이 기가 꺾인 것이다.

대무신왕 4년 12월, 고구려 역사상 처음으로 고구려군이 부여를 공격하였다.

당시 부여는 강한 국가였다.

대무신왕은 주변 세력들을 설득해가며 부대를 진군시켰다.

고구려군은 비류수 강변에서 솥을 생산하는 부정 씨 집단을 만나 군량 문제를 해결하였다.

얼마 후 고구려군은 이물숲에서 장인 집단의 도움을 받아 금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과 각종 무기 등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여를 공격하는 길에 대무신왕은 흰 얼굴에 눈에 광채가 빛나는 거인 괴유와 창을 잘 쓰는 마로란 사람을 얻은 것이 최고의 수작이었다.

부여의 남쪽에는 진흙 수렁이 많았다.

대무신왕은 평지를 골라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했다.

부여군이 기습해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만주 일대 최강국인 부여는 결코 얕잡아 볼 나라가 아니었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군이 경계하지 않고 쉴 때를 기회로 여겨 기병대를 보내 습격을 해왔다.

돌연 나타난 부여군의 기습은 고구려군을 크게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부여의 군대도 급히 공격하느라고 진흙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이때 대무신왕은 괴유를 시켜 대소왕을 향해 공격하게 했다.

주) 부여

기원전 1세기부터 약 300년간 부여족이 지금의 북만주의 농안(農安) 지방과 장춘(長春)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세운 부족 국가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사를 지었고, 고구려와 자주 투쟁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명을 수입하고, 은력(殷曆)을 사용하는 등 비교적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다. 왕과 그 아래에 있는 네 부족장이

하호(下戶)라 불리는 농노와 노예를 다스리는 귀족 정치를 하였다. 추수후, 12월 (음력 11월)에는 영고/맞이 굿)라 불리는 의식이 있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흰옷을 숭상하고, 왕이나 남편이 죽으면 그 신하나 아내를 함께 장사 지내는 풍습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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