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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칼럼](81) 고구려의 발전(부여와의 전쟁)
[장영주 칼럼](81) 고구려의 발전(부여와의 전쟁)
  • 뉴스N제주
  • 승인 2022.12.1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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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고구려는 이웃 나라 부여와의 전쟁이 불가피해 졌다.

특히 부여 금와왕이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 대소가 왕위에 오르며 더욱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유리왕 14년, 고구려 유리왕은 부여 대소왕의 요구대로 조공을 바치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려 하자 태자가 거부함으로, 대소왕은 노하여 5만여의 대군을 몰고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주) 유리왕

고구려의 제2대 왕이자 동명왕 주몽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예 씨고, 성장한 뒤 아버지 주몽이 남긴 징표인 부러진 칼을 찾아 주몽이 세운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곧 왕위에 올랐다. 북방으로 영토를 넓히고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겨 고구려의 기틀을 세웠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 편> 등에 기록이 남아 있다.

동부여와 선비족, 신나라 등 서북쪽에 자리한 외적의 침입에 맞서 영토를 확장했다.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노래인 <황조가>를 남겼다. 고구려 초기의 기틀을 세운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몽의 아들이었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유리가 태자에 오르자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지금의 인천 지역에 미추홀(彌鄒忽)을 세우고 온조는 하남 위례 지역에 백제국(伯濟國)을 세웠다.

그러나 날씨가 변덕스러워 전쟁할 수 없게 되자 대소왕은 회군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사신도 보내지 않고 조공도 바치지 않자 대소왕은 크게 노하여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부여의 신하를 데려가 고구려를 세웠기에, 이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을 덕으로 삼고자 하는 법칙이다.”

즉 부여는 큰 나라로 고구려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데 부여 신하가 뒷받침했기에 가능하다는 말로 아주 고구려를 얕잡아 보는 심산이었다.

유리왕은 서신을 보자 분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 당장…….”

유리왕이 화를 내자,

“고구려는 건국한 지 오래지 않아 국력이 약하니 부여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통촉하옵소서.”

“대소왕에게 잠시 복종하였다가 후일을 꾀하도록 하시옵소서.”

유리왕은 신하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분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할 수 없이 사신을 보내 대소왕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린 왕자 무휼(無恤)은 대신들이 너무나 겁이 많은 것을 통탄하고 혼자서 부여의 사신을 찾아갔다.

“부여 사신은 들으시오.”

어린 왕자의 당돌함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 선조들은 부여국에 있을 때 많은 욕을 당하였소. 고구려 대왕은 지금 군사가 많다고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기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오.”

“사신이 귀국하게 되거든, 당신네 나라가 지금 더 위급하니 남의 나라보다 당신네 나라나 잘 살피도록 하라고 하시오.”

고구려 어린 왕자의 이런 알이 씨가 되어 결국 부여는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이른다.

부여 대국과 고구려 소국의 전쟁은 누가 봐도 고구려가 질 싸움이었지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태자 무휼은 학반령에서 부여군과 부딪쳐 싸울 때 고개 아래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적군의 뒤를 급히 쳐서 승리하였다.

한마디로 부여군들이 예상치 못했던 계릴라 전에서 고구려 군사가 승리함으로 당분간 휴전 상태로 돌입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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