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2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흰
[김필영 시문학 칼럼](2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흰
  • 뉴스N제주
  • 승인 2022.12.3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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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조정권 시집, 시냇달 2014 <서정시학 서정시 128> 80쪽 흰,

조정권

1.

흰 먹으로
흰 산을 그리고

흰 먹을 갈아
흰 산 첩첩히 그리지만

아직도
흰 산엔

가닿지
못하네.

2.

흰 산 높고
그 위 더 넓다.
위는 무상하다 공허하다.

3.

흰 산
늘 구름 자욱하다.

흰 산
늘 구름 끼고 자욱하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백지에 투영된 흰, 공간적 여백의 시학』

흰색은 사물이 밖으로 비치는 색의 기본 색이다. 화가나 작가나 사물을 묘사하는 데에 흰 색 바탕에서 그려낼 때 가장 뚜렷한 모습으로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다.

조정권 시인은 ‘흰빛’이 지닌 가치를 귀히 여기는 시인이다. 같은 시집에 실린 詩 『백철쭉』에서 “하얀 꽃잎에 하얀 글씨로 보낸 저 흰 빛이 나를 청첩했구나.”라고 흰 빛을 투시하는 묘사나, 『설서루』에서 “응달에서 ‘눈’이 서식하고 있다”라고 “흰 빛”을 부각시킨 묘사나, 『예쁜 풍경』에서 “마당에서 한없이 눈 맞는 빗자루가 얼마나 예쁘냐.”라고 흰 빛을 맞아주는 대상을 예찬하여 “흰빛”을 투시하는 詩線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이 아예 『흰』이란 제목으로 써 내려간 시에서 ‘흰빛’은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흰 먹을 갈아 흰 산을 첩첩히 그리”기 전 ‘흰 먹’을 먼저 생각해 본다. 여기 묘사된 흰 먹은 ‘마음의 먹’, 또는 ‘정신의 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묵화의 검은 ‘먹’은 그을음(탄소)과 아교를 넣어 만드는 것인데, 먼저 그을음만 가지고 ‘3만 번’ 찧고, 그 다음 아교를 넣고 ‘3만 번’ 찧어 먹 틀에 넣고 모양을 만든 다음, 재속에 넣어서 말린 후 그늘에 장시간 건조시켜 탄생한다고 한다. 화자는 얼마나 많은 검은 먹을 갈아 벼루바닥이 뚫리고서야 ‘마음의 벼루’에 갈 수 있는 ‘흰 먹’을 얻게 된 것일까. 마음의 먹을 수 만 번 찧어서 ‘흰 먹’ 을 만들었을 화자의 만만치 않았을 생을 생각해보게 된다.

첫 연에서, 화자가 가진 “생의 소망” 이 ‘흰 산’이라면, 시인이 최상의 시를 쓰고자 달려온 길이 ‘흰 산’을 그리기 위함이었다면 “첫 연 종반에서 “아직도 흰 산엔 가 닿지 못하네”라고 묘사함을 볼 때 ‘흰 먹’으로 그리고 그려도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먼 산’임을 감지하게 한다.

둘째 연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흰 산 높고 그 위 더 넓다. 위는 무상하다 공허하다.”라는 묘사에서 그 ‘흰 산’을 그리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시인이 『설서루』에서 “응달에서 서식하는 눈”, 한 폭의 수묵화에서 발견한 것이 ‘수평적 여백’ 이었다면 『흰』에서 발견한 여백은 ‘입체적 여백’을 넘어 넓고 무상하고 공허한 ‘4차원적 여백’임을 느끼게 한다.

우주라는 광대한 영역에 비해 사람이 얼마다 미소한 존재임을 알게 하여 겸허가 마음의 여백을 펼치도록 일깨움 받는 묘사다. 미약한 우리는 그릴 수 없는 ‘흰 산’ 앞에서 절망하고 말아야 하는가.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3연을 보면, 시는 우리의 눈앞에 다시 ‘흰 산’을 보여준다. 자욱하게 구름에 덮여 있는 ‘흰 산’, 나약할지라도 ‘우리를 한없이 불쌍히 여긴 슬픔에게’ 감사하며 우리가 그려야할 ‘흰 산’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흰 먹’을 갈아 다시 ‘흰 산’을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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