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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영 시문학 칼럼](2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인생
[김필영 시문학 칼럼](2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인생
  • 뉴스N제주
  • 승인 2023.01.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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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안수환 시집, 앵두 2014<예술가시선 01>101쪽, 인생, 감상평 : 김필영(시인)

인생

안수환

내가 놓친 것은
당초무늬 질그릇 뚜껑만이 아니다
칫솔을 놓치고
손수건을 놓치고
읽고 있던 칸트를 놓쳐버렸다
내 아내를 놓쳐버렸다
허무한 인생,
그러나 정말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 것은
가벼운 먼지였다
가볍게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인생이었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生의 본질을 통찰한 철학적 詩學』

‘인생’, 이렇게 보편적이고 광역적인 제목으로 발표된 시는 드물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사람의 수만큼 각자의 삶의 빛깔과 가치의 기준이 다양하여 무엇이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음일 것이다. 안수환의 시는 “인생”을 어떻게 모습으로 비추어주는가, 시의 내면을 탐색해 본다.

시의 첫 행은 “내가 놓친 것은”이란 행간으로 시작된다. ‘놓친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사물을 떨어뜨리거나 소유를 잃어버렸을 때 쓰는 말인데 첫 연에서 시인 자신인 듯한 화자는 네 가지 사물, ‘당초무늬 질그릇 뚜껑’과 ‘칫솔’과 ‘손수건’과 ‘칸트’를 놓쳐버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당초무늬 질그릇 뚜껑”은 아내가 시집올 때 신랑을 위해 준비해온 ‘밥그릇의 뚜껑’인 듯하다. 밥을 담아 따뜻하게 뚜껑을 덮어야 할 ‘밥그릇뚜껑’이 없다면 더는 더운밥을 먹을 수 없다.

3행에서 “칫솔을 놓”쳤다는 묘사를 ‘양치질할 의미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면 치아를 닦을 당위성이 없는 것은 바로 뚜껑을 덮지 않은 ‘식은 밥’마저도 먹어야 할 의미를 잃은 것, 즉 끼니를 때우는 의미를 잃은 상황일 수 있다.

이어지는 4행에서 화자는 ‘손수건’마저 놓치게 된다. 손수건이 없다는 것은, 땀이나 눈물을 닦을 연유가 없음이니, 일할 의욕의 상실을 의미하며, 눈물마저 메말라 슬픔의 한계를 넘어선 비통한 상태를 생각할 수 있다. 외적 자아를 단장할 의미를 잃어버린 체념의 상태다.

1연의 마지막 행간은 “읽고 있던 칸트를 놓쳐버렸다”고 한다. 읽고 있던 ‘칸트’를 왜 놓친 것일까. 비판철학의 대가인 칸트의 저서 어떤 부분을 읽고 있었던 “칸트를 놓쳤”다 함은 칸트의 비판철학의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가치론적’ 철학 등, 철학을 향한 지식섭취의 더듬이기능을 포기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내적 자아와 타(他)를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찾는 논리, 물리, 윤리, 자연의 법의 가치가 의미 없음인 듯하다. 무엇이 화자로 하여금 이토록 모든 것을 놓쳐버리게 한 것인가?

모든 궁금증은 한 행 뿐인 2연이 대답해준다. 바로 “내 아내를 놓쳐버”린 것이란 행간의 충격은 일련의 많은 것들을 “놓쳐버린” 사건의 순서는 행간이 뒤바뀐 것임을 느끼게 한다. ‘아내를 놓치’게 된 후, 모든 놓치게 되는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내’라는 존재는 나와 한 몸이자 몸 밖, 또 하나의 자아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자아를 ‘놓친 것’이 된다. 이제 모든 실마리는 풀렸다. 이 시에서 ‘아내’라는 시어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크다. ‘나’라는 말보다 크다.

‘아내’라는 존재를 놓쳐버리자 “허무한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 가벼운 먼지”같은 “가볍게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인생”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티끌로 만들어져 티끌로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진리를 떠올리게 되는 시의 결구에 이르러 가슴 먹먹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슬프되 반드시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초연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끈질기게 따라붙어 결국 또 하나의 ‘나’인 ‘아내’를 놓치게 만들고 ‘나’라는 존재마저 거두어갈 ‘죽음’이라는 ‘적’이 결코 두렵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결코 우리 인생을 모두를 거두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두어 갈 것 역시 ‘내가 가볍게 가볍게 들고 있던’ 한 낱 ‘먼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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