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24)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수련 그늘
[김필영 시문학 칼럼](24)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수련 그늘
  • 뉴스N제주
  • 승인 2022.12.2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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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홍해리 시집,『독종』: 현대시세계 시인선 036,) 15쪽, 수련 그늘

수련 그늘

홍해리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소리 아니겠느냐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
수련 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
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
물속 암자에서 피워 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
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
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어라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웅숭깊은 기다림의 사유(思惟), 그늘의 미학』

‘그늘’이란 사전적으로는 불투명한 물체에 가려 빛이 닿지 않는 상태이다. 사물의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 그늘은 삶과 예술에 있어서 둘 다 똑같이 적용되는 미학적, 윤리적 패러다임이다.

그늘은 한국의 예술, 한국의 미(美)에서 세계의 예술에 결코 뒤지지 않는 우월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적 관점에도 그늘은 그 자리가 광역적이다. 시야를 詩적 관점으로 좁혀보면 ‘그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홍해리 시인의 시「수련그늘」을 통해 ‘그늘의 미학’의 일면을 더듬어 본다.

화자는 바람이 연못가에서 수련을 바라보고 있다. 물위에 떠 있는 연록색 수련의 잎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의 이면을 보고 있다. 대유법(代喩法)을 통해 수련 잎에 가린‘한 뼘의 둥근 그늘’을 보는 화자의 눈은 웅숭깊다.

한 뼘 둥근 수련그늘 밑의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수직의 깊음에서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을 찾아내는 눈이 놀랍다. 수련그늘의 깊이가 ‘천 길’이라는 것은 ‘천명의 사람 키’만큼의 깊이가 아니라 수련의 그늘에서 수직으로 지구를 관통하여 반대편 하늘 공간 너머 무한한 길이를 상징하고 있다. 화자는 무슨 연유로 수련그늘에서 무한의 깊이를 생각한 것인가?

수련 그늘에서“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자 화자가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기를 희구하는 ‘기다림의 숙명적 존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 학자의 ‘거문고와 가야금의 배음구조에 따른 색청 연구’에서는 ‘가야금은 노랑에 가까워서 밝고, 거문고는 보라에 가까워 어둡다’고 기술하였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소리 아니겠느냐“는 표현에서 ‘거문고 소리”를 차입함으로 ‘기다림’으로 치환된 ‘그늘’의 기간과 빛깔을 감지하게 한다. 그러나 숙명적 기다림의 깊고 긴 그늘의 시간이 결코 지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오히려 그늘 깊은 곳까지 맑게 들여다보이는 것은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고 독백하듯 초대하는 행간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의 기다림은 아픔을 모면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림 속으로 뛰어들어 아픔을 일상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증된 기다림은 마음을 살찌게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엔 눈물샘이 열리곤 한다. 자나 깨나 계속 되는 기다림이기에, 그늘의 시간을“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눈을 붙일 때에도 꿈을 꾸는 듯, 연못에 떠 있는 수련 잎들은“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로 여기며 꿈에라도 천마를 타고‘너’라는 존재가 오기를 고대한다.

우리가 희구하는 것들을 향한 기다림은 많은 아픔을 수반하는‘그늘’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당신’이라는 존재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일엔 눈물보 터트리듯 서러워해선 안 될 일이다.

“수련 잎에 눈물 하나”가“그리움의 사리”처럼 구르듯 사무치게 참아내고, “물속 암자에서 피워 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이듯, 경건하고 담담하게 희구해야 한다.

수면위로 방긋 웃는 수련 한 송이 “하얀 꽃의 속내”조차 짐작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기에, 수련그늘 아래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처럼 의연하게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려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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