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2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살 흐르다
[김필영 시문학 칼럼](2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살 흐르다
  • 뉴스N제주
  • 승인 2023.01.14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신달자 시집. 살 흐르다(민음의 시 203) 14쪽. 살 흐르다. 감상평:김필영

살 흐르다

신달자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
살 흐르는 소리가 살살 내리고 있다.
30년 된 나무 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
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 한마디 말없이 사라져 갔다
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 주지 못했다
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흘러갔을 것이다
조금씩 실어 나르는 손이 있다
멀리 갔는가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
거기 가늘가늘 소리가 들린다
다 닳는다
다 흐른다
이 밤 고요히 자신의 살을 함께 내리고 있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사라지는 살들, 영혼으로 보는 고요의 소리』

살이란, 사람이나 동물의 뼈와 신경 따위를 싸고 있는 부드러운 물질을 이르는 말이나 모든 존재의 주체를 詩적으로 묘사하면 ‘살’이며 그 살들은 나타나 존재했다가 사라져간다.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초정밀촬영장비가 등장하여 건물 안은 물론 거리에서도 수많은 카메라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를 촬영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주체 해당하는‘살’이 나프탈렌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는 기계는 세상에 없다. 단 하나 시인의 눈은 사라져가는 살들을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신달자 시인의 눈을 빌어 살들이 사라져가는 고요의 소리를 동영상으로 들여다본다.

화자는 거실에 홀로 앉아 있다.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살 흐르는 소리가 살살 내리고 있”는 것을 본다. 소리를 보는 것, 그것도 살 흐르는 소리를 보는 것은 시인만이 볼 수 있는 초미시적(超微視的) 시안(詩眼)이다.

“30년 된 나무 의자도 모서리가 닳았”고, “300년 된 옛 책장은 온몸이 으깨어져 있다.”“그 살들 한마디 말없이 사라져 갔”음을 확인할 수 있을 때, 화자는 그 살들이 사라져가던 “살 살 솰 솰 그 소리에 손 흔들어 주지 못했”음을 돌이키게 된다.

그것은 기화현상이라는 사라짐만을 말하고 있음이 아니다. ‘살’이 흐르며 사라져가는 것의 양태는 단순한‘소멸의 미학’이상을 은유하고 있다. “소리의 고요로 고요의 소리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묘사에서‘살이 흐르는 것’이라는 물리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의자의 마모나 책장의 손상은 곧, 숙명적으로 겪어야 했을 동반자(주인)와 함께한 시간이었고 삶이었음을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살의 흐름’이라는 근원적 배경에“조금씩 실어 나르는 손이 있다.”고 하므로 화자는 사라져가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한계를 초월한 우주적 힘 이상의 섭리가 존재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은 항상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조여 온다. 그 아쉬움은 때론 사무침으로 때론 그리움으로 몰려온다. 고향, 아버지, 어머니, 형제, 친구들, 꼬막손을 쥐며 꾸었던 청운의 꿈들, 거짓 없이 사랑했던 사람. 만남의 축복과 지킬 수 없었던 것을 놓아야 하는 별리의 고통을 겪으면서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은 기억의 가지 끝에서 펄럭이다 낙엽처럼 기억의 소매를 놓아버리곤 한다.

그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면 가눌 수 없는 슬픔에서 누가 헤어날 수 있으랴. 그러나 행간은 얼마나 “멀리 갔는가”라고 아득히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불러 세우고 시선을 모은다.

시의 결구에 이르러,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갔을지라도 먼 시선 끝에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모인“어느 흰빛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서둘러 가려한다고 쉽게 당도할 수 없고, 만지려 해도 닿을 수 없는 그 ‘흰 빛 마을’이, 남아있는 모든‘살’이 다 흐르지 않고는 갈 수 없는 피안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포기의 빛깔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닳는 존재’이며, 우리의 살은 다 흐르는 것이기에, ‘살’이 흐르며 사라져가는 소리를 “가늘가늘”들으며 “이 밤 고요히 자신의 살을 함께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