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38)오해와 편견, 다지나가리라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38)오해와 편견, 다지나가리라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3.10 0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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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시대의 경제인
행복한 CEO송주온 성공 이야기
끊임없이 긍정하고,또 긍정하라
송주온 BT&I그룹 대표
송주온 BT&I그룹 대표

198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자본금 250만 원으로 시작한 비티앤아이(BT&I)를 2600억 원대의 항공권을 판매하는 코스닥 상장기업으로 성장시킨 송주온 대표.

35년간 국내 최고의 기업체 전문 여행사로 성장하기까지 여행업 한길로 매진하여 자연스럽게 한국 여행 전문가 그룹의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행복한 CEO.

제14회 여성경제인의 날 모범여성기업인상 대통령상 표창, 제12회 여성경제인의 날 국세청장상, '2011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40인(<포춘코리아> 주최)'에 선정됐으며, 현재 W아너 소사이어티 총리더인 송주온 대표는 건전한 기부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시민참여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발간되는 <포브스>에서 발표한 '아시아 기부 영웅 48인' 중 한 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여성 CEO로는 처음으로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한 그녀는 나눔과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행복한 CEO'란 별명에 걸맞게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뉴스N제주가 창간 6주년을 맞아 마련한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의 38번 째 '나는 99번 긍정한다'의 핵심은 바로 '정도'이다.

자신의 학창 시철을 서술한 내용을 보면 학창시절 얼굴이 예쁜 학생들은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송주온 대표만이 아니고 많은 여학생들이 그렇게 사연이 있는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 돌파구로 송 대표는 정도를 택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해결이 안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바른 길,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결과가 좋게 나와 그런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낸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항상 위기가 찾아온다. 그럴 때 가장 확실한 것은 정도, 즉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회사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회사 대표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도전하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대표가 안일하게 그대로 과거의 것을 답습한다면 회사의 비전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다. 이 도전으로 얻는 것은 무한하다. 결국 도전으로 해서 손해보는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결과를 얻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가?"
그 답이 이 안에 있다.
변화에 두려우 하지 말라
도전하는 사람이 결과를 만든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이사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직원들의 마음에 녹아 단합된 회사로 만들어진 것이다. 새로운 것은 막상 주저하게 되지만 익숙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성공한 것이다.

오늘도 새로운 눈을 가진 당신의 시간을 응원하면서 많은 필독과 관심바랍니다. [편집자 주]

 

제38장
안전지대를 벗어나 변화를 택하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에 휩싸일 때가 있다.
특히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는 오해와 편견으로 진실이 외면당하기 쉽다. 미국생활에서 소통이 자유롭지 못할 때 나 역시 곤란한 일을 겪었다. 정말 당시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9학년(중학교 3학년 해당)으로 학교생활 적응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영어를 습득하여 학교생활에 완벽히 적응할까 고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돌아볼 새도 없었다. 더군다나 영어가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질문도 받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고 있 었다.
"너 남자친구가 무시무시하다며?" 어느 날 반 아이가 묻는 것이었다.
"남자친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너 정말 아니야? 소문이 쫙 펴졌는데?"

나도 모르는 내 소문이라니. 그것도 내가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남자친구라니 어이가 없었다. 하긴 소문이란 당사자가 가장 늦게 아는 법이었다.

그 아이가 말하는 내 남자친구란 한국 교포였던 선배였다. 유급을 해서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주먹께나 쓴다는 선배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학교 일진 같은 선배로, 워낙 주먹질을 많이 해서 학교에서도 골칫거리였다.

학교에서 가끔 부딪치기는 했지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바른 행동만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교육 때문에라도 껄렁껄렁한 아이들은 피해 다녔던 나로선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

그 부류의 아이 들뿐 아니라 누구와도 되도록 말을 섞지 않았던 당시 내 상황이 오히려 오해를 낳게 했던 모양이다. 나 혼자서 도도하게 다닌다는 말이 나오면서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한번 꺾어보겠다는 묘한 객기가 발동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소문에 의해 일진 선배의 여자 친구가 되어버린 거였다. 정작 나는 그 선배와 한 마디 말조차 나눈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 선배는 자기가 찍었다는 이유로 아무도 내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스쿨버스에서 내 옆에 앉은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하는 등 아무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위협까지 했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선배가 너무 무서워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선배는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내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써서 가져왔는데 그 선배의 얼굴을 보고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얼굴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고, 팔에는 '경애' 라고 선명하게 칼로 파고 담뱃불로 지진 흔적을 보여준 것이다. 너무나 섬뜩한 나머지 두려움에 다리도 후들거리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오히려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소문을 내고 말았다. 소문은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커졌고, 기어이 우리 부모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억울하고 황당하기로 치면 당사자인 나만 하겠는가마는 당시만 해도 누구도 날 믿어주지 않았다. 7년을 넘게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마치 내가 한국에서부터 비행청소년이었던 듯 호되게 꾸짖으셨다.

"나는 정말 억울해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오해는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받고 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동안 나는 부모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바르게 살려고 했는데, 부모님은 당신들이 챙기지 않아 잘못되었다고 여기신 것 같았다.

너무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을 한들 당시 부모님께서는 변명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을 분위기였다.

'곧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게 되실 거야.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억울함에 몰래 울면서 생각했다. '곧 지나가게 되리라'는 말처럼 시간을 통해 내 진실을 알아주실 거라 믿었다.

결국 나는 모든 행동에 감시를 받게 되었고, 나를 걱정한 아버지는 한국인이 없는 다른 학교로 전학 수속을 하셨다. 여전히 오해는 풀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 학교에 있는 동안 그 선배에 대한 공포는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전 학교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내게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학교에서 다른 선배가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 흑인 아버지가 재혼하게 된 후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을 겪던 선배였다.

"나를 만나주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 학교에서 받은 오해 때문에 전학까지 왔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 입장을 확실히 밝혀둬야 더 이상 귀찮 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죽고 싶으면 죽어라!"

그런데 이게 웬일, 며칠 후 그 선배의 어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내 멱살까지 잡으며 온갖 상소리를 다했다. 나는 더 이상의 오해를 만들기 싫어 단호하게 말한 것일 뿐인데, 그 선배가 진짜로 음독자살을 시도했던 모양이었다. 3일 만에 의식을 되찾은 후에 가출을 하고 말았다며 마치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는 양 따지러 왔던 것이다.

미국 생활 초기에 받은 충격 때문에 내 나름대로 올바르게 처신한다고 했으나 오히려 전보다 더 강도가 큰 충격을 몰고 온 결과가 되었다.
남자 때문에 생긴 두 번의 일로 나는 뜻하지 않게 문제아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내 진실을 알아달라고 한들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남자아이들과 사귀기라도 했으면 덜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내겐 그런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가득한 나였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에도 부모님께 칭찬받고 싶어서 더욱 행실을 바르게 했던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가뜩이나 예민한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나니 미국이란 곳이 정말 싫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동생과 워싱턴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살소동을 일으킨 그 선배를 보게 되었다. 폭력과 가출을 일삼던 그 선배는 지금 미국 동부지역에서 교회 사역을 하는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나를 위해 기도까지 해주었으니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무튼 두 번의 일로 집안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귀가시간은 물론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딸로 생활해야 했다. 미국에 와서 적응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 생활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도 없고, 이해받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도 워낙 보수적이고 완고한 아버지는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인의 특유한 보수까지 몸에 배어 나를 더 단속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첫딸인 내게 애정과 미안함을 함께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도 몸에 흉터라도 생길까 봐 노심초사하시면서 그네나 미끄럼틀조차 못 타게 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첫딸을 몇 년 동안 떨어뜨려 놓은 미안함에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더욱 완고하게 표현하셨던 것 같다.

사랑한다는 표현에 서투른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였지만 내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전학을 시켜준 것을 나름대로 최선의 보호책이라 여기셨던 것 같다.

그래도 미국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내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학생의 신분이었으니 일단 공부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국에서도 경험했듯이 집중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금세 성적이 올랐다.

초등학교 때 주산과 암산을 배웠던 게 수학에 도움이 되었다. 여느 여학생들과 달리 나는 수학을 잘했고, 특히 도형에 관련된 기하학을 좋아했다. 한국 학생이 거의 없던 터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을 지닌 학생으로 소문이 났고, 공부도 잘해서 금방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모든 과목에서 'A'를 받게 되었던 나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수학과 과학 스터디 모임에 가입을 했다. 모두 7명이 같이 모여 공부를 했는데, 그중 나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명문 아이비리그에 있는 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어서 서로 경쟁도 되고 격려도 되었다.

늘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수학적 사고가 성격과 딱 맞았던 것 같았다. 수학(기하학) 문제를 풀며 증명하는 과정은 도전과 성취감을 맛보게 했다. 결과 값이 딱 떨어져 나오는 수학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내 성격과 상당 부분 맞았던 것 같았다.

성적이 올라가니 집에서도 안심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저녁 9시면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친구네에 가는 것도 허락받기 힘들 정도였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셔서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 살짝 친구네 가서 놀기도 했다.

물론 엄마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엄마는 나를 감싸느라 아버지께 싫은 소리도 여러 번 들으셨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졸업파티에 남학생에게 초대를 받고도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무엇을 염려하는 건지 알지만 일생에 한 번뿐인 졸업파티를 가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이들로부터 오해를 산다는 것은 무척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사실을 밝힌들 한껏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바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그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이해인 수녀님의 <오늘을 위한 기도> 라는 시에서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제가 더러는 오해를 받고/가장 믿어왔던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쓸쓸함에 눈물 흘리게 되더라도/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길을 가는 인내로운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힘을 얻었다.

오해와 편견은 다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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