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42)나는 99번 긍정한다 ... 부부가 같은 꿈을 꾸며 인생을 설계하라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42)나는 99번 긍정한다 ... 부부가 같은 꿈을 꾸며 인생을 설계하라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4.07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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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시대의 경제인
행복한 CEO송주온 성공 이야기
끊임없이 긍정하고,또 긍정하라
송주온 BT&I그룹 대표
송주온 BT&I그룹 대표

198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자본금 250만 원으로 시작한 비티앤아이(BT&I)를 2600억 원대의 항공권을 판매하는 코스닥 상장기업으로 성장시킨 송주온 대표.

35년간 국내 최고의 기업체 전문 여행사로 성장하기까지 여행업 한길로 매진하여 자연스럽게 한국 여행 전문가 그룹의 오피니언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행복한 CEO.

제14회 여성경제인의 날 모범여성기업인상 대통령상 표창, 제12회 여성경제인의 날 국세청장상, '2011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40인(<포춘코리아> 주최)'에 선정됐으며, 현재 W아너 소사이어티 총리더인 송주온 대표는 건전한 기부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시민참여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발간되는 <포브스>에서 발표한 '아시아 기부 영웅 48인' 중 한 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여성 CEO로는 처음으로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한 그녀는 나눔과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행복한 CEO'란 별명에 걸맞게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뉴스N제주가 창간 6주년을 맞아 마련한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의 42번 째 '나는 99번 긍정한다'의 핵심은 바로 '부부는 가장 큰 동반자'라는 내용이다.

송주온 대표는 욕심쟁이다. 일에대한 욕심, 가정에 대한 욕심, 100% 만점을 받고 싶어 한다. 사실 직장에 매진하면 가정에 소홀해지고, 가정에 집중하다보면 직장에 소홀해지는 게 다반사다.

그러나, 송주온 대표는 여느 사람과 달랐다. 현명한 CEO다. 자식을 위한 재단을 계획하고 베스트 프렌드이자 사랑하는 남편과 항상 사랑이 깊어지면서 서로 아끼며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있다.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면 이러한 관심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회사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회사 대표의 비전에 기인한다고 본다. 대표가 어떤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하느냐에 따라 경쟁력은 하늘고 땅 차이가 날 수 있다. 일과 휴식을 조화롭게 생각하는 CEO야말로 회사를 오래 크게 성장시킬 수 있다.

​"무엇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가?"
그 답이 이 안에 있다.
일과 휴식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
그것을 도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결과를 만든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이사가 멀리 보는 시야로 일과 휴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본인은 물론 직원까지도 동화된다면 회사는 단단한 회사로 만들어진다.

오늘도 새로운 눈을 가진 당신의 시간을 응원하면서 많은 필독과 관심바랍니다. [편집자 주]

제42장

부부가 같은 꿈을 꾸며 인생을 설계하라

나는 종종 미혼으로 오해를 받는다. 내가 아들 둘을 둔 기혼자라고 하면 깜짝 놀라고들 한다. 여성 CEO들은 대개 일과 결혼해서 독신으로 산다는 선입견 때문이리라.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나는 제일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일이며 더불어 남편하고 결혼한 일이 내 인생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느 여자들처럼 나는 불꽃같은 사랑을 꿈꾼 적도 있었는데, 남편과는 오랜 정이 쌓여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은 대학교 다닐 때 선배 소개로 알게 되었다.

직접 만난 게 아니라 사진만 보고 펜팔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남편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는 내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을 때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국제우편으로 정을 쌓아갔다. 지금도 그동안 받았던 편지 박스가 있는데 침대 밑에 깊숙이 보관해 두고 지금도 가끔 꺼내보곤 한다.

무서운 게 정이라더니 8년간 편지를 주고받다가 든 정이 우리 둘을 연결해 준 끈이 되었다. 오랜 펜팔 끝에 1990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많은 부부가 실망을 한다는데, 나는 오히려 정말 결혼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알면 알수록 진국이고 보물 같은 남자였다. 내가 남자는 아니지만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을지라도 결혼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드는 건 사실이다.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
행복한 CEO 송주온 대표

부부는 서로 반대의 성격을 가져야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우리 부부는 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민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나와 반대로 남편은 섬세하지만 물같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스타일이다.

너무 순수한데다 나를 많이 이해해 준다. 남편은 잘 때도 미소를 띠고 있을 만큼 그 자체로 긍정적인 사람이다. 일에 있어서도 내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나는 지금은 긍정적이고 부드러워졌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완벽주의자 같은 성격이라 매사 옳고 그름을 따졌다. 남편의 성격은 온화해서 나와는 정반대였는데, 그런 매력에 끌려서 결혼했다.

처음에는 내 스타일이 절대 아니었지만 남편의 성격에 점점 끌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을 결심했을 무렵, 나는 회사를 안정시키느라 심신이 무척 지쳐 있었을 때다.

1990년 11월 결혼을 하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직원들에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결혼 초기 미국에서 살 때는 출산과 양육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5년 다시 돌아오겠다는 한국 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시민권, 영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다. 남편과 둘째아이는 2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한국행을 결정하고 내가 큰 아이와 먼저 왔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나는 남편이 필요했지만 미국의 일이 정리가 되지 않아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많이 싸웠다.

그리고 미국에서 개업한 병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남편은 시민권을 포기했다. 남편은 본가도 미국에 있고, 외아들인데 오로지 나를 위해 결정한 것이다.

1997년,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IMF를 맞게 되었다. 미국 집을 정리할 때만 해도 700원 정도였던 달러가 1600원으로 환율이 올랐다.
얼마나 기가 막힌가? 남편은 서초동 우면도서관에서 한국의사시험을 준비하면서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IMF 시절이다 보니 미국에서 제대로 대우받고 살다가 한국에 와서 적응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미국보다 훨씬 낮은 보수에 마음고생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이런 사람이기에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너무나 고마워 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IOU'처럼 난 남편에 진 빚이 많다.

"자기야!,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야! 마음을 편하게 가졌으면 좋겠어"

완벽주의자로 불평불만에 지적의 여왕이었던 나는 스스로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이 한 마디가 나를 바꾸어 놓았다.

늘 긍정적이던 남편에게 결국 내가 동화되고 만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느끼게 되었고, 감사를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고 산 것은 결혼 후 아마도 5년 정도 된 것 같다.

남편은 아내가 잘하는 것을 알고,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돕는 것이 외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은 서로의 일을 존중하고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는 일에 많은 조언을 주고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해주는 편이라 심적으로 많은 의지와 위로를 받고 있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웃음꽃이 활짝 피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남편은 내 표정만 봐도 내 상태를 금세 파악한다. 직원들하고 힘들었는지, 기쁜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고 내 기분을 풀어준다.

보통 일하는 여성들은 집안일과 자신의 일을 잘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회사 일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간다. 남편과 아이들과의 약속을 우선순위에 두고, 개인 일정이나 미팅도 취소할 정도로 철저히 지킨다.

비록 회사 일이 힘들면 힘들다고 가족에게 털어놓을지언정 가족이 언제나 우선이다. 그것이 가정도 회사도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가정을 중요시 하는 것을 알기에 남편이나 아이들도 내가 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 옆에 없어도 아이들은 큰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바쁜 엄마를 이해해 주고 도와주니 고마웠다.

우리 부부는 일에 있어서도 도움을 주고받는다. 내가 외국기업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미국에서 치과를 개업했던 경험과 유창한 영어로 진료가 가능해서 많은 고객이 남편의 치과에서 진료를 받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많다. 가까운 지인들은 "두 부부를 통해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치과 치료까지 받으니 부부를 먹여 살리느라 죽겠다"고 농담도 건넨다.

남편은 탈북자 기관인 '하나원'에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고 있다.

탈북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고 사할린 동포 할머니에게 틀니를 만들어 주는 등의 봉사를 했다. 그것 때문에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있는 두 아들 이외에도 사랑의 인연을 넓혀 가려고 한다. 한국어린이재단의 이사로 활동하는 나를 많이 도와주면서 '내가 할 일이 이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기부를 하면서 남편의 도움과 이해가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기부라는 좋은 일을 해도 누군가의 마음이 불편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아들들의 이름으로 만든 A&W Yoo재단을 만들어 50세가 되었을 때 정식으로 출범하려 했다.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아 작은 규모로 여러 곳에 기부하고 있지만 아마 60세 전후로는 나눔의 일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앞으로 더욱 사랑이 깊어지고 아끼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내가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하도록 도움을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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