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은 대부분 자신과 관계된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모든 행동의 중심이다. 힌두교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나를 아트만(atman)으로 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육체적인 자아와는 다른 변치 않는 모습의 초월적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육체가 죽어도 이 아트만이 새로운 몸을 받아서 윤회한다고 본다. 이를 영혼이라고 보는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개인에 내재 (內在) 하는 원리인 아트만과 우주의 궁극적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을 같은 것으로 보고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요가를 하는 요기들은 궁극적으로 범아일여의 상태로 명상한다.
불교에서는 이 아트만을 부정한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는 연기의 현상일 뿐이다. 아트만이 단지 인(因)과 연(緣)으로 생겨난 것일 뿐이라는 관점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용수(龍樹;Nagarjuna)는 부처의 연기론을 좀 더 쉽게 설하였다. 그는 2세기경(150~250)에 남인도에서 바라문 종족 출신으로 출생하였다. 용수는 용(龍)으로 인해 불교의 깊은 경지가 완성되었으므로 ‘용(龍)’을 글자에 썼으며 용수의 어머니가 ‘아르주나(ārjuna)’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았으므로 ‘나가르주나(龍樹)’라고 불렀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젊은 나이에 여러 나라에 명성을 떨쳤는데 천문·지리·여러 도술에 대하여 통달하였다. 화엄경, 반야경, 금강경, 금강 삼매경 등이 그의 손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용수가 제창한 대승불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中道)를 따른 ‘중관(中觀)’을 중시하였는데 그는 ‘반야경(般若經)’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일체가 공(空)하다는 것을 설파하였다.
그는 절대적인 무(無)라는 관점과는 다르게 공을 설명하였다. 모든 현상은 인(因)과 연(緣)으로 생겨났다가 인(因)과 연(緣)으로 변화하고 인(因)과 연(緣)에 따라 사라진다. 용수는 이것을 공이고 가명(假名)이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 말하였다. 단 하나의 현상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한 것이다.
여러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이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인과 연에 따라 생멸하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인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의 양극단을 벗어나기에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공·연기·중도는 모두 같은 것이라고 용수는 설하였다.
용수의 가르침은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용수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부처님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그리고 중도(中道)에 대한 가르침에 따라 ‘중론(中論)’을 저술하고 공사상을 체계화시켰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같은지라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인데, 영원히 다르다거나 같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용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실천하여 대중의 잘못된 집착을 타파하며 파사(破邪) 하였고 중도를 밝혀서 현정(顯正) 하였다. 현상계는 여러 인연이 화합한 존재로서 인연에 의해 생기기도 하고 인연에 의해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대부분의 증오와 분노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