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대한 인식은 저마다 다르다.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살만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드물지만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한다.
비말라키르티 니르데샤 수트라(Vimalakīrti Nirdesa Sūtra)라고 하는 불경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나온다. ‘때 묻지 않은 이름’이라는 뜻의 ‘비말라키르티’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하면서 ‘유마힐(유마라힐)’이라고 바뀌어 ‘유마경’이라고 널리 알려졌다.
‘유마경’에서 장자의 아들 보적은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 부처가 되고 싶다는 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쪼록 청정한 부처의 국토와 그 국토를 세우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은 “착하도다, 보적이여. 이제부터 그대의 물음에 대해 설하리라. 도를 구하는 중생에게는 어디서나 중생이 사는 곳 그대로가 부처의 국토인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부처의 국토는 중생들에게 보시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지만, 비유컨대 모든 집은 대지 위에 세우는 것과 같이 부처의 국토는 마음을 대지로 삼아 세우기 때문이다.
보적이여, 부처의 국토를 세우는 것은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깊은 마음, 도를 구하는 마음, 베푸는 마음, 잘 거두어 어지럽히지 않는 마음, 지혜와 자비를 낳는 마음인데, 이것은 모두 방편을 내어 중생들에게 도를 얻게 하는 마음이다.
보적이여, 그러므로 청정한 부처의 국토를 얻고 싶다면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야 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가 사는 국토도 청정하게 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이때 사리불은 마음속으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고 하시는데 세존은 일찍이 도를 구하셨을 때 꿈에도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셨을 텐데도 이 세상은 어째서 이처럼 더러워져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다.
세존은 그 마음을 헤아리고 “사리불이여, 장님은 해와 달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해나 달이 빛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것은 장님의 허물이지 해나 달의 허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들의 죄업으로 인하여 불국토의 청정함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청정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깊은 진리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내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게 보인다는 가르침인 것 같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내가 세운 기준으로만 본다면 세상은 대부분 어긋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살펴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삶을 사는 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사리불이 “이 세계는 언덕이나 산이나 자갈이나 흙이나 형극 등의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바라문이 “그것은 그대가 부처의 지혜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 높고 낮음의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고 청정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이 국토 역시 청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사리불과 바라문의 대화가 끝났을 때 세존이 발을 들어 대지를 가리키시니, 홀연히 세계가 변하여 찬란한 빛으로 싸여 있고 대중들은 어느새 보석으로 장엄하여진 연화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부처님은 “나의 국토는 언제나 이처럼 청정하다. 그러나 마음이 좁고 어리석은 사람은, 악과 더러움이 가득 찬 세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중생들이 모두 나의 설법에 따라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눈을 닦고 본다면 언제나 이와 같은 장엄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세존이 신통을 거두시자 세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보적 장자를 비롯한 많은 청년은 법의 실상을 보는 눈을 얻어 한없는 환희에 젖었다.
세상을 보는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면 장엄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혼란한 마음을 ‘사마타(止, Samatha)’와 ‘위빠사나(觀, Vipaśyanā)’로 청정하게 하려고 오늘도 정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