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란 칼럼](5)그럼, 세상은 혼자 살지 않지!
[공영란 칼럼](5)그럼, 세상은 혼자 살지 않지!
  • 뉴스N제주
  • 승인 2024.01.31 15: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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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수필, 작사가
(사)종합문예유성 총무국장
가곡작사가협회 상임위원
공영란 작가가
공영란 작가

내가 사는 읍에 속한 여러 리 중, 한곳의 몇 안 되는 작은 마을의 최근 일이다. 어린 시절 땟거리가 없어 매일 굶다시피 해 동네 사람들이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던 박 도길 이야기다. 

가난을 헤어나지 못해 학업조차 이어가지 못하다, 그 시절엔 어쩌면 크다고 할 수 있는 얼마의 빚까지 갚을 길이 막막해진 그의 집은 야반도주를 했다. 무엇을 했는진 몰라도 악착같이 살았음은 분명하다. 

그랬던 그의 가족은 서울에서 엄청나게 크게 성공해 돈을 어마하게도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지만 그의 가족도, 그도 그간 단 한 번도 고향 방문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 그가 마을 땅을 샀는지 오십 년 만에 혼자 고향으로 귀농했다.

얼마 전 마을 농지 중 한가운데 위치해 탁 트여 넓고 좋은 곳에, 근처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집 한 채가 지어졌다. 영화에서나 본 듯한 재벌 회장님네 별장보다 더 멋지고, 아름답게 조경을 꾸민 으리으리한 삼층집이다. 집 짓는 공사가 시작될 때, 마을 여럿의 땅을 거쳐 한가운데 짓는데는 좁은 농로뿐이라 애로점이 많았다.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은 집 짓는 데 필요한 건설장비들과 자재들을 옮기기 편리하도록, 기꺼이 그들의 땅을 길처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그 덕에 집은 번듯하고 무탈하게 금방 지어졌다. 

동네 사람 모두는 공사 기간 내내 궁금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이런 시골에다 이렇게 집을 잘 지어 들어오는지. 건설 관계자들이 오갈 때마다 누구 집인지, 뭐하든 어떤 사람이 오는지, 물어도 집 짓는 누구도 완성될 때까지 다 몰라 더 그랬다.

집이 완성되고, 이사 온 이가 박 도길 이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 놀랬지만, 그의 성공과 무관하게 그저 고향 사람이 다시 와준 것만으로도 너무도 반기며, 여러 가지 맛난 음식을 해 마을회관에 모여 환영 잔치를 해줬다. 

그렇게 야반도주했던 집의 아들이, 자식들은 모두 해외에서 박사로, 연구원으로 아주 큰 외국기업에 종사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서울의 큰 회사는 딸과 사위에게 줬다고 했다. 

아내를 일 년 전 암으로 먼저 보내고, 자신도 당뇨와 고지혈증 진단을 받아 이제 일은 그만하고, 과수원 가꾸는 걸 소일 삼고, 여가로 즐기며 쉬엄쉬엄하다 고향에서 죽고 싶어 왔다고 했다. 과수원은 그의 집에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졌고, 그 옆의 작은 논 하나도 그가 산 것이었다. 그곳도 가려면 또 다른 사람의 땅을 반드시 지나야만 했다.

환영식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 대표로 이장이 그에게 말했다. “크게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됐다니 너무 기쁘고, 고향에 다시 오니 대환영이다. 새로 이 마을 일원이 되었으니 축하하고, 서로 잘 지내봅시다. 이 마을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내야 할 마을 발전후원금이 있다. 

어느 집이든지 이 마을 사는 한집 당 다 낸 것이니, 따지지 말고 내주면 좋겠네.” 하며 말한 금액이 이백만 원이었다.

 실제 이 마을은 객지로 나가 성공한 집의 자녀들이 고향을 위해 낸 후원금에 모든 집마다 낸 마을발전후원금을 보태 지금처럼 많이 바뀌었다.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마을에 공동 지하수를 파서, 마음껏 물 사용할 수 있게 집마다 수도를 놓았고, 가뭄 걱정 없이 농업용수 사용도 풍족하게 되었다. 

없던 길도, 차량이나 농기구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각자의 땅을, 조금씩 내어줘 농로를 넓게 만들고 마을회관도 지어, 각 집안의 대소사를 회관에서 치루는 경우가 많았다.

박도길 사장은 마을 사람들의 발전 기금 요구에 황당했다. 그래서 환영식에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마을 사람들과 이장에게 부당한 요구한다면서, 엄청나게 화내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랬으니 마을 사람들의 앞뒤 말을 듣지 않았음은 당연지사, 그들 방식을 이해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했다. 

그래서 그들과 말도 썩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했는지, 아예 모두를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이후 마을 사람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집 둘레를 높게 철망으로 에워쌌다. 

그는 자신의 땅에 쳐진 펜스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영혼으로 건강한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은 이 마을과 상관없이 혼자 잘 살 수 있으니까, 그냥 없는 사람치고 나한테 이래 저래라 간섭하지 말고, 피곤하거나 귀찮게 말조차도 걸지 말라고 윽박지르며, 누구도 자신의 땅은 절대로 접근도 말고, 밟고 다니지도 말라고 엄포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마을 사람들도 어이없어 엄청 화가 났다. 

그래서 화를 누르며 그에게 알맞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조용한 응답을 했다. 네 생각은 잘 알겠고, 존중한다. 우리 마을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 상관 않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어. 

우리도 네 방식대로 원칙대로 할 것이니, 너도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양해를 구하지 말길 바란다. 

당연지사 말 거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겠지. 하고 말한 내용에 박 도길 그는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골 농로가 처음부터 길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법원 토지대장 등기부에 원래 소유주가 분명 다 있게 마련이지. 

그 소유주가 농로의 주인이니, 주인 허락 없이 남의 것을 함부로 침입하거나 사용하면 안 된다. 

저기 지방도는 구청 땅이니 맘대로 다녀도 되지만, 자네 집까지 오는 농로는 자네 땅은 하나도 없고, 다 이 마을 사람들 땅이니 앞으로 절대로 밟고 다니지 말아야겠지. 

또 자네 과수원하고 논으로 가는 길, 그것도 자네 소유 땅이 아니고 다 임자 있는 땅이니 절대로 밟지 마시게. 

그리고 자네 집 수도, 그것도 다 이 동네 사람들의 돈으로 판 지하수도로 연결된 것이니, 자네는 자네 마당을 파서 하든지 우리가 관여할 일 아니니 알아서 하시고, 우리 것은 일단 연결은 끊겠네. 

이게 다 자네가 원하는 원칙대로니, 앞으로 절대 우릴 탓하진 마시게. 만약, 어길 시 신고해서 엄벌해달라고 하겠네. 하고 간 후 정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누구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땅을 절대로 허용하지도 않아, 눈앞의 과수원 과실이 익어도 수확은커녕 그림의 떡 마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정말 약과였다. 순박한 시골 사람은 다 옛말처럼 느껴졌다. 독하게 나오는 그들로 인해 그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었고, 물조차 맘대로 사용이 불가했다. 

어디를 오가려 해도 그의 집 위치가 동네 사람 소유의 땅을 거치지 않고는 꼼짝할 수 없었다. 화가 났지만, 발전후원금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번 닫힌 그들은, 그따위 돈이 없어 우리가 그런 줄 아냐며, 그를 외면하고 상대해주지 않았다. 발 없는 소문은 빠른 법이다. 

이미 읍내 인근 마을에까지 쫙 다, 그의 이야기는 퍼져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의 누구도 그를 상대하지 않고 외면했다. 

그는 결국 이사 온 지 삼 개월 만에, 그렇게 잘 지은 집과 과수원 등 모든 소유를 부동산에 내놓았다. 

다시 서울로 이사하며 영영 고향엔 발도 못 붙이겠다. 는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늘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다.

 힘든 그 상황에서 어느 집에서나 할 것 없이 조금씩의 빚을 얻어 생활하다, 능력에 부닥쳐 그의 부모는 야반도주했다. 

그리고 여태 누구에게도 일 원 한 푼 갚지 않았다. 

물론 흐른 세월이 반백 년이라 갚지 않아도 법적으론 문제 되지 않는다지만, 분명 그것을 기반으로 여기까지 잘 살아왔음은 분명한 것이다. 

또 귀향을 위한 집을 지을 때 기꺼이 자신들의 땅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고, 이사 오니 정말 기쁨으로 반기며, 환영해 준 모두이다. 

부모의 몫일지 모를 일에 사과하지 않음은 그럴 수 있다. 

성공하고도 빚 청산은커녕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음에도, 지난날을 문제 삼지 않고 환영하는 이들에게 감사가 우선됐어야 했다. 

때론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경청할 필요가 있고, 당장은 부당하다고 생각한 일도 돌아보면 그것이 타당할 때도 분명히 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곳이든 그곳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또 사람은 다 다르다. 

그렇기에 설령 나와 다른 부분이 있을지라도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혹, 다른 부분이 있을 땐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때만 가능하다. 

의외로 그 마음이란 한 번 닫히면 쉽게 열리지 않지만,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열과 성의를 보이면 봄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게 되는데, 박 도길 그의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포기가 빠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며, 사람은 사랑을 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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