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4) 당산봉과 뱀 설화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4) 당산봉과 뱀 설화
  • 뉴스N제주
  • 승인 2020.08.0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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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1]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
(사)질토래비 이사장
문영택 수필가

눈섬과 매바위섬을 감상하며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우리는 전설의 바다와 한라영봉의 풍광을 바라보며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해안가 절벽 위의 길을 걸었다. 저 너머 차귀도와 마주한 수월봉과 그 아래 펼쳐진 들판이 어서 오라 손짓했다.

옛날에 ‘법서용궁또‘라는 뱀신을 모신 당이 있는데서 유래한 당산봉을 올랐다. 당오름이라 부르기도 하는 당산봉에는 당산봉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지석묘도 있었고, 신석기 동굴집자리도 발견되었다. 특히 지금의 리사무소 근처인 고산리 2228번지에 차귀진성이 있었다. 리사무소의 안내로 찾아간 진성에는 기단석이라 보이기에는 너무 초라한 흔적만이 남아있었다.다음은 근처에 있는 표지석의 내용이다.

• 차귀진(遮歸鎭) 터 : 차귀방호소를 두었던 터. 원래 이곳은 몽고가 축성하여 아막(阿幕)을 설치하고 목마관리를 하던 곳이었다. 1625년(효종 3년) 이원진 목사가 진을 설치하고 여수(旅帥)를 두었다. 성의 둘레는 1천4백66척 높이 10척이며 동시에 성문과 객사 군기고 등이 있었다. 제주 서북지역의 해상방위를 위한 요충지로서 처음에는 만호를 두었으나 1716년 이후 이를 혁파하고 조방장 1명 방군 1백21인 등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제주사회는 절오백 당오백이란 말이 전해올 정도로 민간신앙의 뿌리가 깊다. 마을마다 수호신을 모시는 당은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토대이자 기둥이었다. 거기다가 유배 온 사람들의 훈학과 조선조의 유교문화가 파급되면서 무속과 유교문화가 공존하기도 했다. 다음은 1679년(숙종 5년) 제주암행어사 겸 순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이증이, 제주에 5개월간 체류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일기체로 적은 ‘남사일록’의 한 대목이다.

‘차귀당은 차귀악(지금의 당산봉)의 기슭에 있는데, 뱀 귀신을 위한 무속사당이다. 지붕, 벽, 들보, 초석에 무리진 뱀들이 서리서리 얽혀 있으나, 제를 지낼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서롭다.’

고산리 차귀당 내부
고산리 차귀당 내부

① 3대 국당의 하나인 차귀당

당오름에 있었던 성황사(城隍祠)인 차귀당은 뱀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다음은 고산리 입구 당오름 주변에 세워진 차귀당에 대한 안내의 글이다.

차귀당(遮歸堂)의 옛 터전 : 이곳은 옛적부터 대정현 성황사(城隍祠)인 차귀당이라고 하여 뱀 귀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성황신은 중국에서도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왔다. 토속신앙에서 서낭당 ․ 산신당이라 불려졌으며 사직단․성황당․여단(厲檀)을 삼단(三壇)이라 하며 조정에서는 각 군현에 이를 세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대정현에서는 조정의 지시로 성황사를 새로 짓지 않고 차귀당으로 대신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곳에 기와 파편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官)에서 관리하는 성황당이라 기와집으로 지었었다. 제례의식은 유고적이 아닌 무속적 굿이었다. 입춘굿이 목사 이하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신방의 굿으로 진행하였던 것으로 이해가 간다. 이 당은 1704년 목사 이형상에 의해 소각되고 또 수년이 지나 복원되어 지내다가 1882년(고종 19년)에 마지막 훼철되었다.

왕조마다 종묘사직을 세워 나라를 운영한데서 보듯 지방에서도 농사와 지신을 모신 사직단과 성황당이 제주에서도 세워져 제의를 지내기도 했다. 다음은 제주시 목관아지 건너 향사당 부근에 있었던 성황당과 여단에 대한 안내 글이다.

(이곳은) 성황당과 여단이 있었던 터(이다). 성황사는 원래 주남 16리 한라산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여단 옆에 설치되었다. 성황당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성황발고제가 봉행되었으며, 여단에서는 못된 전염병에 죽은 사람 등 제사를 받지 못하는 억울한 여귀들을 위하여 봄, 가을, 겨울에 걸쳐 일 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제주의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에는 당신의 내력담(來歷談)이 전해 온다. 그것은 부락민을 보호해주는 당신의 내력이면서 동시에 부락민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즉, 제의식인 재차(祭次)에서 당신의 근본을 심방이 구술하면, 그 내력이 자신의 내력과 비슷함을 깨닫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는 다시 사람들 사이로 전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내력담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쌓여있는 한도 풀어낸다.

대정현에서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성황사를 새로 짓지 아니하고 차귀당으로 대신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기와 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관에서 관리하는 성황당을 기와집으로 지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례의식을 입춘굿처럼 심방굿으로 하였던 이 당은 1704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파괴되었다. 수년 후 복원되었다가 1882년 마지막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그 자리에 표지석과 함께 자그마한 신당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을 읽으며 휘둘러 가 야트막한 오름을 오르다보니 이내 정상에 올라 정자에서 쉬며 주변 경치에 넋을 잃기도 했다.

당산봉에 있던 차귀당은 탐라시대부터 제주시의 광양당(지금의 삼성혈 부근에 있었다고 전함)과 안덕면 덕수리의 광정(廣靜)당과 함께 3대 국당(國堂)이라 전해진다. 광양당은 한라산 수호신을 모시는 당이었고, 차귀당과 광정당은 사신(蛇神)을 모시는 당이었다. 1871년 대원군의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90년 지역 주민에 의해 차귀본향당으로 복원되었다.

제주도를 흔히 신들의 고향이라 한다. 제주선인들은 달을 보고 조수의 간만을 알고, 별자리를 보고 배의 방향을 잡았으며, 하늘과 바다와 구름을 보고 바람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따르므로 제주선인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었다.

고산리 차귀당 내부
고산리 차귀당 주변

제주선인들이 섬겼던 신들의 총본산은 광양당(廣壤堂, 현 상섬혈)이었다. 1486년(성종 17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1653년(효종 4년) 이원진 목사가 편찬한 탐라지에는 광양당을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로도 기록하고 있다. 1702년 이형상 목사는 숭유정책의 일환으로 도내의 음사, 절간 등 130개소를 불태워 없애고 광양당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유교 예식에 따라 제례를 행하였는데, 300년 전까지만 해도 광양당의 원형은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조정의 정책인 유교의 혹독한 음사탄압에도 광양당 신관의 대사(臺詞)는 비밀리에 전승되어 이두문으로 기록되고, 이것이 다시 제주인 문창헌에 의해 풍속무음(風俗巫音)이라는 이름으로 필사 편집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향토사학자 고용희는 전한다. 다음은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 초본의 한 대목이다.

광양당은 고을나 신을 모신 곳이다. 송나라 호종조(胡宗朝 : 제주에서는 호종단 또는 고종달이로 전한다.)가 제주땅에 와서 기운을 눌러버리고 바다를 건너 돌아가는데 신으로 변하여 매가 되어 날아올라 돛대의 맨 꼭대기에 앉았다. 순식간에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조의 배를 격쇄하여 버리니, 비양도 바위 사이에 빠졌다. 조정에서는 그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을 포양하여 광양왕에 봉하고 해마다 향폐(香幣)를 내려서 제사하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정현 산방 서북쪽 큰길가에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당(淫祠)이 있는데, 광정당(지금의 안덕면 덕수리 소재의 신당)이라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이 걸음을 멈추고 다리를 전다. 목사 이형상이 순행하며 지나갈 때, 서리가 말을 내리라고 하자 듣지 않아서 말이 과연 발을 절면서 구부려졌다. 친히 그 당으로 가서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죽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그 신은 볼 수가 없고 요망한 이무기가 나와서 독을 뿜으며 물으려 하니,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마침내 그 뱀을 베고 그 당을 불태우니 음사가 마침내 끊겼다.

제주도에는 부락마다 1,2개 씩 있을 정도로 260여 개의 당이 있었다. 제주선인들은 성황당이 부락의 모든 액을 막아주는 수호신이 상주하는 곳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당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당을 성스러운 곳으로 받아들였다.

제의 과정 중에 당에 매인 심방이 당신을 구송하는 데 이것이 본풀이이다. 본풀이는 종교적인 엄숙성과 함께 마을사람들의 일상사와 관련이 깊다. 제의에서 구술되는 당신의 내력은 동네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즉, 당신들은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거하면서 그들의 길흉화복을 주재해 주고 그 값으로 마을사람들에게 봉양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신의 내력담을 모으면 제주사람들의 삶이 형상화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당신을 찾는 사람들은 심방과 만나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다양화된다. 그래서 본풀이는 주술성과 예술성을 지닌다. 제주도의 당신 본풀이에는 보편적 이미지와 함께 사회성과 역사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당신이 마을에 좌정하게 된 경위와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정착해 가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그 사례를 뱀신 신앙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뱀은 풍요의 상징물이자 반인간적인 속성을 지니기에, 본풀이에서의 뱀은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은 존재로 나타난다. 배척을 받았기에 인간에 대한 복수심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론 관계를 개선하려고 한다. 자기를 위해 주는 자에게는 풍요를, 배척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준다. 이렇듯 뱀은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결국 방황하다가 제주에 와서 좌정한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② 제주섬에 터 잡은 칠성신

옛날 옛적에 장나라 장설룡과 송나라 송설룡이 부부가 되어 살았다. 큰 부자였지만 5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자, 온갖 제물을 준비하고 절에 가 백일불공을 드려 딸 하나를 얻었다.

딸이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장설룡이 천하공사, 어머니 송설룡이 지하공사 벼슬살이를 가게 되었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딸을 단단한 방에 가두어 놓고 떠났다. 집안일을 돌보는 정하님에게, 잘 키우고 있으면 벼슬살이 마치고 와서 종 문서를 돌려주겠다고 부탁했다. 며칠 후 아기씨가 보이질 않았다. 찾지 못한 정하님은 상전에게 편지를 띄웠다. “아기씨가 사라졌으니 어서 바삐 돌아오십시오.”

딸은 부모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문이 제대로 닫혀 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방을 빠져 나와 부모가 갔다는 나라를 찾아 산길을 달렸다. 길은 끝이 없고, 두 이레 열나흘을 울다보니 아기씨는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스님 셋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아기씨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아기씨가 힘을 내어 불렀다.

“앞에 가는 대사님아, 나를 살려 주옵소서.” 세 번째 스님만이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우리 절에 와서 불공을 드려 낳은 그 아기씨로구나.”하고 스님은 반가워하면서 아기씨를 장나라로 데려갔다. 이럴 즈음 장설룡 대감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귀한 딸을 찾으러 온 세상을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해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웬 스님이 대문 앞으로 들어섰다.

중은 아기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할 짓 못할 짓 다 하다가 문 밖에 숨겨놓고는 도망쳐 버렸다. 장대감이 집 주위에서 찾은 아기씨 얼굴에는 기미가 끼고 배가 불룩했다. “양반집에 이거 무슨 창피한 일이냐. 가문의 수치로다. 중놈의 자식을 배다니.” 귀하게 얻은 딸을 죽일 수 없는 부부는 무쇠상자에 딸을 넣어 바다에 버렸다. 상자는 조류를 따라 제주바다 산지포구에 들어왔다. 산지포구에는 이미 자리 잡은 바다 당신이 있었다. 그 옆 마을 화북 포구로 들어가려고 하니 거기에도 이미 자리 잡은 당신이 있었다.

이 마을 저 마을 포구로 들어가려 했으나 포구마다 자리 잡은 신들이 있었다. 다행히 함덕마을 동쪽 갯가로는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일곱 잠수들이 물질도구를 메고 ‘썩은개’에 왔다가 무쇠상자를 발견했다. 서로 자기가 먼저 보았다고 다투는 것을 송첨지가 말렸다. “그 속에 금이나 은이 들어있으면, 일곱이 똑같이 나누어 가지고 무쇠상자는 나를 주면 담배 갑으로나 쓰겠다.” 하니 모두들 좋다고 했다. 송영감이 무쇠상자를 세 번 메어치니 뚜껑이 열렸다.

해녀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니, 뱀 여덟 마리가 누워있는 게 아닌가. 장설룡 딸이 뱀 일곱 마리를 낳고 뱀으로 환생한 것이다. 기대가 무너진 송첨지는 낚싯대로, 해녀들은 비창으로 뱀들을 이리저리 헤쳤다. 그런데 해녀 일곱과 송첨지 영감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마지막으로 점을 쳐보기로 했다. 이름난 점쟁이는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신을 박대한 죄가 크다. 신을 청해서 굿을 하라.’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들은 심방을 불러 큰굿을 했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을 뿐만 아니라 재물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해녀들과 송첨지 영감은 그 마을에 칠성당을 짓고 신을 계속 위했다. 마을사람들도 신을 위하니 마을이 부촌이 되었다.

오랫동안 떠돌던 뱀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제사를 받고 위함을 받으니 너무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는 제주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칠성 뱀들은 제주성으로 향했다. 낮에는 사람이 안 다니는 좁은 길로, 밤에는 큰길로 해서 제주성 가까이 있는 화북에 이르렀다. 일곱 아기 뱀들은 제주성 동문 밖의 동산에 올라 가락천까지 갔다. 물길이 내려가는 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을 기어 성 안 산지 금산물가에서 쉬고 있을 때, 물을 길러 온 부인이 뱀들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여긴 부인은 치마를 벗어 입구에 놓고 물을 길었다. 물을 긷고 나와 보니 치맛자락에 뱀들이 누워있었다. ‘내게 내려주신 조상님이거든 어서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는 뱀을 치맛자락에 싸서 집으로 모셔가서는 고팡에 두었다. 그로부터 그 집은 부자가 되었다. 칠성(뱀)이 제주성 안에 들어와 맨 처음에 그 집에 좌정했기 때문에 그 골목을 ‘칠성골’이라 불렀다.

하루는 뱀 어머니가 일곱 아기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가로이 다니면서 언제까지나 얻어먹을 수도 없으니 너희들도 갈 곳을 찾아 가거라.” 딸 뱀들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터를 잡고 신이 되었다. 큰딸은 추수할머니로, 둘째는 이방과 형방 차지로, 셋째는 옥지기로, 넷째는 과원할머니로, 다섯째는 창고지기로, 여섯째는 관청할머니로.집 뒤 칠성으로 들어간 막내딸이 어머니가 머물 곳이 궁금했다.

‘나는 고팡으로 들어가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큰 뒤주, 작은 뒤주 아래로 곡식을 섬으로 지키는 이, 말로 지키는 이, 되로 지키는 이, 다 거느려서 안칠성으로 들어서서 얻어먹겠노라.’ 이리하여 어머니 뱀은 안칠성으로 들어서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 주는 신이 되었다 전한다.

뱀신이 된 대감집 외동딸인 아기씨는 부모와 중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부모도 그녀의 기구한 처지를 이해해 주지 않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살아가는 중들도 여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여겼을 뿐이다. 세상에 대한 한을 품은 딸이 낳은 일곱 자식이 모두 뱀이 되었다. 중의 불륜의 씨가 뱀이 되었다는 이 역설은, 인간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제주까지 왔으나 어엿한 당신(堂神)으로 좌정할 곳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집안 여러 곳의 신으로 좌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뱀신은 쫓겨 온 당신들 중에도 한이 많고 인간으로부터 배척당한 외로운 신이다. 뱀신이 외롭기에 절해고도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의 정을 더 받았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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