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3)차귀도 풍광과 전설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3)차귀도 풍광과 전설
  • 뉴스N제주
  • 승인 2020.06.1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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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1]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
문영택 수필가, (사)질토래비 이사장
거인형상의 차귀도와 수월봉이 보이는 용수리 바닷가와 방사탑
거인형상의 차귀도와 수월봉이 보이는 용수리 바닷가와 방사탑

죽도라고도 불렸던 차귀도는 한경면 고산리 포구 가까이에 있는 군도(群島)의 이름이다. 지실이섬, 상여섬, 형제섬, 생이섬 등 여러 섬들로 구성되었다. 차귀도는 국가지정 문화재인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422호)으로,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수산생물이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풍부한 해양자원 생태계와 함께 우리나라 미기록 종과 신종 생물이 발견되는 곳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지역이라 한다. 자구내 포구에 있는 옛 등대인 도대불과 한치 말리는 어촌풍경, 바다에 떠있는 섬들과 주위를 에워싼 경관들이 즐비해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제주 설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백장군의 어머니인 설문대할망은 아들들 먹일 죽을 끓이던 솥에 빠져 죽었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이지만, 막내가 본 것은 어머니의 유골이었다.

형들이 미운 막내는 차귀도로 날아가 돌이 되고, 형제들도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해 영실 절벽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 40여 년 전 나는 차귀도 앞바다에서 뱃놀이 하다 실족하여 바다에 빠졌던 즐거운 추억거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차귀도에 외롭게 서 있는 그 바위가 오백장군의 막내바위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아다.

이번에는 차귀도 지명의 유래가 된 전설을 떠올렸다. 중국 송나라 시절, 제주섬은 풍수지리가 출중하여 유능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리란 점괘가 나왔다. 이를 시기한 중국 조정은 압승술에 능한 호종단에게 제주의 지맥과 혈맥을 끊으라는 명을 내린다. 제주에 온 호종단은 여기저기에서 지맥과 수맥을 끊곤 산방산에 도착한다. 산방산 아래의 와룡 형상이 바로 왕의 기운이 배어 있는 명당이라 여긴 그는, 예리한 무쇠침으로 용의 가슴임직한 곳을 찌른다.

그러자 시뻘건 피가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은 그만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명을 마친다. 와룡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는 원혼을 간직한 채 바위로 굳어져, 안덕면 사계리 바닷가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 제주 도처에서 혈맥을 끓은 호종단의 만행을 뒤늦게 안 한라산신령이 매로 변장하여 날아가, 호종단 일행의 탄 배를 차귀도 주변 바다에서 난파시켰단다.

차귀도(遮歸島)는 호종단의 귀국을 차단한 섬이라는 의미이니, 전설이 곧 사실임직도 하다. 귀국하지 못한 한을 안고 이곳에 수장된 호종단은 결국 이곳에서 고국을 바라보며 바위섬이 되어 누워있다고도 하는 데, 호사가들은 이 섬을 일명 호종단 바위라고도 한다.

차귀도 모습(사진=김덕희 기자)
차귀도 모습(사진=김덕희 기자)

제주선인이 지어낸 상상의 세계에 나는 감탄을 하곤 한다. 상상력을 통한 창의적인 긍정의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 지금 우리가 문화라는 밭을 경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사료에 의하면, 호종단은 실재했던 인물이란다. 고려사절요 1111년(예종 6년) 요목에는 호종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호종단은 12세기를 살았던 송나라 복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태학에 들어가 정통으로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유람을 하던 중 고려에 귀화했는데, 박학하고 문장에 능하여 고려왕의 총애를 받아 주요 관직을 맡았다. 압승술을 부릴 줄 아는 그를 고려왕 예종은 좋아했지만, 다른 관리들은 왕을 현혹시킨다며 비판했다.

압승술은 당시 유행했던 도교의 한 방술이다. 호종단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그를 총애했던 고려 예종은 특히 도교에 심취해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했다. 가뭄이 극심할 때 비가 오도록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거나 나쁜 재앙을 물리치도록 요술을 거는 것이 도교의 방술이지만, 반대로 좋은 일을 누르기도 하는 게 도교의 압승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선의 명당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압승술의 일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개의 전설과 신화는 상징이므로 이를 실제 역사와 맞춰보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호종단에 대해서도 실제 역사 속 인물과 전설 속 인물을 별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시대 사람인 호종단이 제주에서는 고종달 또는 고종달이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것도 그러함에서 연유한다.

조선시대에서는 호종단이 헌마공신 김만일 증조부의 묘 자리를 봐주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이미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있던 전설이 뒤늦게 제주에 전해지면서, 실제 호종단이 살았던 시기와 김만일의 증조부가 사망한 시기가 300년이나 차이가 있음에도 전설의 내용이 보태지거나 창작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선인들은 무언가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특히 간절히 원하는 일이 현실과 너무나 다를 때 신화나 전설 속에서 찾거나 대안을 만들어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가령 자신에게 명주 속옷 한 벌을 만들어주면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거대한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는 것과 같다.

탐라 백성들이 부지런히 옷감을 구했으나 명주 100통이 있어야 함에도 99통밖에 구하지 못해 속옷을 못 만들었다. 그 결과 제주섬은 육지와 이어지지 못했다. 육지에서 고립된 섬 백성들의 짙은 아쉬움과 함께 떨어져 사는 이유를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 찾아내어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음이다.

차귀도 전설은 제주섬에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큰 인물로 성장하지 못하는 아쉬움, 또는 토지가 척박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 위안일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선인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창조력이 더욱 돋보이는 설화이기도 하다.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시대인 지금, 제주선인들이 지은 전설과 설화가 더욱 값진 유훈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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