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2)차귀진에서 고산리로 가는 역사의 길을 따라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2)차귀진에서 고산리로 가는 역사의 길을 따라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0.06.06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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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1]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
문영택 수필가, (사)질토래비 이사장
차귀도 모습(사진 김덕희 기자)
차귀도 모습(사진=김덕희 기자)

차귀현은 지금의 한경면 고산리의 옛 이름이다. 뒤에서 보게 될 호종단의 전설에서 유래하여 차귀라고 불렸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탐라의 속현이었고, 조선시대에는 대정현에 속했던 차귀현에 대한 기록들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원진의 탐라지 등 몇 사적에서 모았다.

고려 말에 모동장(毛洞場 : 원의 서아막 목장 터에 숙종 3년인 1705년 소를 키우기 위해 대정과 한경지역에 설치된 목장)에서 누루하치가 성을 쌓고 말을 기르던 곳이었으며, 누루하치가 돌아간 뒤에는 진이라 하여 ‘성정군, 방군, 하후선’을 두었다.

그 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방호소를 처음 세운 것은 1439년(세종 21년)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에 의해서다. 한승순이 처음으로 둘레 2,466척(1척은 30센티임), 높이 22척의 축성을 쌓고, 성내에는 군기고까지 마련하였던 중요한 요새지였다.

이후 고려 말과 조선조에는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자, 1652년(효종 3년) 이원진 목사가 당시 죽도인 차귀도에 진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이곳에 성을 쌓고 병영을 만들어 차귀진이라 했다. 여수(旅帥 : 약 125명의 병력)을 두었는데, 1675년(숙종 1년) 여수를 파하고 조방장을 두었다.

성의 둘레는 1,19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동서로 조루가 있었고, 성 안에 진사 ․ 객사 ․ 무기고 등이 있었다. 병력은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32명, 봉수연대 별장 12명, 봉군 24명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 태풍으로 차귀진의 남북 수구 홍문이 쓸려가 버리자, 다시 공사하여 북쪽 수구 위에 공신정(拱宸亭)3도 세웠다. 차귀진은 고산리 2228번지 일대(리사무소 근처)인데,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가 목마하면서 서아막(西阿幕 : 목축 관리소)으로 축성하였던 곳이다.

현촌은 고려조의 말단 행정단위로, 고려 1105년(숙종 10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개편한 데 이어, 1153년(의종 7년)에는 군을 또다시 현으로 내려 현령관제가 실시되었다.

그 후 도내에 14개현을 두었는데, 귀일 ‧ 고내 ‧ 곽지 ‧ 귀덕 ‧ 명월 ‧ 신촌 ‧ 함덕 ‧ 김녕 ‧ 토산 ‧ 호촌 ‧ 홍로 ‧ 예래 ‧ 차귀 등이다. 토산, 호촌, 홍로, 예래를 제외한 나머지 현촌들은 산북 쪽 바다에 접해 있어 산남에 비해 산북지역이 취락 형성과 발달이 상당히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의 포구 취락은 명월포, 애월포, 북포(현 화북포), 김녕포, 도도포(현 도두포), 귀일포, 고내포, 함덕포, 차귀포, 토산포(현 안덕면 대평리) 등이다. 고려 말에 빈번했던 왜구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방호소 및 수전소의 명칭을 띤 진(鎭) 취락이 형성되었다. 당시 주요한 진 취락으로는 조천, 김녕, 도근포(현 외도), 애월, 차귀, 명월, 서귀, 오조 등이다.

차귀도 일몰(사진=고민수 작가)
차귀도 일몰(사진=고민수 작가)

당산봉인 차귀봉과 수월봉 사이에 있는 바닷가에 차귀포가 있다. 이곳은 포구에 병선을 배치하고 외적에 대비하여 차귀진을 두었던 요새지다. 차귀악 봉수대는 남쪽으로 모슬악 봉수와 호응하고, 동쪽으로는 제주목의 판을포 봉수와 호응한다.

차귀방호소는 성을 둘러 성안에는 객사와 군기고를 두어 서부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서낭당인 차귀사는 뱀을 숭배한다.

1652년 이원진 목사가 차귀진을 구축했을 당시, 차귀진은 동서 양쪽에 문을 내었고, 우두머리는 조방장이었다. 1706년(숙종 32년) 송정규 목사에 의해 진의 우두머리가 만호로 승격되었다가 10년 후인 1716년(숙종 42년) 어사 황구하에 의해 다시 조방장으로 격하되었다.

차귀진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이 일대를 방어하자 왜구들의 침입이 줄어들고 평화가 찾아왔다. 다음은 이원진 목사의 시다.

“비 갠 영주 기상 새로워 / 윤건 쓰고 홀로 성 위 언덕에 오르니 / 북은 대륙과 이어지는 삼면의 바다 / 서는 중국과 떨어져 한 점 먼지 / 농부는 담을 쌓아 말 뜯어 먹을 까 막고 / 들판의 노인 술을 가져와 뱀신에게 드리네 / 이제 죽도엔 풍파 없으매 / 장군은 할 일 없어 비단 자리에 취하네”

왜구들의 침입으로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에 1837년 이후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이주민이 증가하여 큰 마을을 이루어 1840년 차귀를 신두모라 개칭하고, 1861년 향사인 도갓집을 처음으로 신축하면서 마을 이름을 당산리로 개칭하고 구민장을 두었다.

1892년 당산리를 고산리로 개칭, 1906년 고산리 상 ‧ 하동을 통합하고 경민장을 이장으로 개칭하였다. 1915년 신성사숙(혹은 이문서당)이 향사에서 개교하여 인근지역의 신교육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1906년에 이르러 조방장과 무기고를 없애면서 차귀진성으로서의 역할은 끝나고 만다. 조방장은 지금의 5,6급, 만호는 4,5급 정도에 해당하는 벼슬이름이다.

다음은 보물 제652-6호인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의 41화폭 중 하나인 차귀점부(遮歸點簿)의 내용이다.

1702년(숙종 28년) 11월 13일 실시. 차귀진의 조련과 점검도. 이형상 목사가 친히 점검하지 않고 당시 군관으로 있던 사과(司果) 홍우성을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고, 이형상 목사는 문서상으로 점검하고 있다. 점검 결과의 내용은 차귀진 조병장 김국준, 방군(防軍) ‧ 기병 ‧ 보병이 20명이며, 그 외로 군기도 점검하였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 ‧ 우두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모동(毛同)의 삼나무 밭과 우자장(宇字場) 목장이 보인다.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탐라순력도에 대하여 덧붙인다.
탐라순력도는 병와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재임당시인 1702년(숙종 28년)부터 1703년 사이제주도 관내를 순력하면서 제주의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화공(畵工) 김남길로 하여금 그리게 하여 꾸민 화첩으로 그림과 세체 총 43폭의 채색 그림이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원본은 제주시가 보관중이며 원본 크기와 같은 영인본이 제주박물관 등지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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