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2)탐라와 제주에 숨은 의미 찾기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2)탐라와 제주에 숨은 의미 찾기
  • 뉴스N제주
  • 승인 2020.11.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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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2]나는 천사방성의 땅 탐라가 낳은 왕자손이로소이다!
문영택 수필가 · (사)질토래비 이사장
문영택 수필가
문영택 수필가

문영택 칼럼인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 제1편의 '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가 마무리 되고 이제 본격적인 탐라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제2편 '나는 천사방성의 땅 탐라가 낳은 왕자손이로소이다!'의 제목으로 지난 번부터 독자들과 만납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① 탐라와 제주에 숨은 의미 찾기

탐라(耽羅)는 신라와 같은 나라의 의미이다. 반면, 제주(濟州)는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란 뜻으로, 광주 ‧ 나주 ‧ 신의주처럼 고을의 의미이다. 신라의 국명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란 말에서 비롯되었다. 즉 덕을 쌓는 일을 매일 새롭게 하면, 그 영향으로 국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탐라, 성주, 왕자라는 명칭은 언제 어떠한 과정으로 지어졌을까? 국가의 뜻을 지닌 나라는 한자 라(羅)에서 비롯된 데서 보듯, 탐라는 신라와 조공관계의 나라 즉 어엿한 왕국이었다. 이즈음의 제주역사가 기록된 한 대목이다.

“고을나 15대 손인 고후 ‧ 고청 ‧ 고계 3인이 배를 만들고 바다를 건너 탐진(강진)을 거쳐 신라 서라벌에 갔다. 이때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나므로 태사가 아뢰기를, ‘이국인이 내조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도착하니)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장자는 성주(星主), 이자(二子)는 왕자(왕께서 둘째인 청을 아들처럼 대한 까닭), 막내 계자(季子)는 도내(度內)라 하였다. 읍호를 탐라라 하였는데, 신라로 올 때 처음에 탐진에 정박한 까닭이다.”

제주도에서 한반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뱃길은 추자도를 거쳐 탐진에 이르는 해로이다. 탐진이란 옛 고을은 지금의 탐진강이 흐르는 장성과 장흥 그리고 강진 일대의 지역이다. 이곳에는 본토에 왕래하는 탐라선인들을 대상으로 숙박 등을 하는 탐라촌이 성시를 이루었다고도 전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의해 탐라라는 국호는, 탐진을 거쳐 신라를 왕래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당시 탐라선인들은 덕판배를 타고 한반도는 물론 송나라, 당나라, 일본, 유구, 더 멀리 아라비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할 정도로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화북포구나 조천포구를 떠난 배는, 추자도를 거처 중국과 한반도 등지로 갔을 것이다.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는 해산물과 축산물을 싣고서, 해외에서는 쌀 ‧ 소금 ‧ 약재 ‧ 비단 ‧ 철재도구 ‧ 도자기 등을 싣고 왔을 것이다.

추자도는 해상요충지였기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나날이 이주해서 거주하였다. 1374년 목호(牧胡 : 원나라가 운영하던 탐라목장 관리자)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2만5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오는 길에 들렸던 곳도 추자도이다.

최영 장군 군영이 명월포(지금의 옹포)로 상륙하여 목호를 새별오름 등지에서 진압하니, 드디어 탐라는 원의 백년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영 장군 일행이 제주에 오가면서 추자에 들려 농사 및 어업기술을 전수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추자사람들은 최영 장군 사당을 지어 지금도 제의를 올리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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