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5)새내기 교사 시절의 차귀현 풍경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5)새내기 교사 시절의 차귀현 풍경
  • 뉴스N제주
  • 승인 2020.08.2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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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1]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
(사)질토래비 이사장
문영택 수필가
당산봉에서 바라본 차귀현 섬
당산봉에서 바라본 차귀현 섬

태평양의 넘실대는 파도와 한라산 자락의 풍광에 도취되다보니 내딛는 걸음마다 가볍다. 게다가 이곳은 나만의 추억이 도처에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77년 갓 사범대학을 나와 새내기 교사가 된 나는, 이 마을에 있는 고산상고 교사로서 1년간 근무했었다. 틈나면 주변의 한적한 길을 찾아 마냥 걷기도 했던 그 시절, 당산봉은 전경대가 주둔하여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지금은 오름 안이 개방된 지 오래 되어서인지 꽤 넓은 분지가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진 오름 등성이를 걷는 기분은 더욱 환상적이다. 앞으로는 전설이 서린 차귀도의 섬들이 떠 있고, 동쪽으로는 용수리의 절부암 바닷가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풍차들이 바람 따라 돌아가고, 서쪽으로는 수월봉과 한라산 사이로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당오름을 내려오니 저만치서 ‘자구내’포구가 우리를 반긴다. 자구내 바닷가를 거닌 일행은 고산평야라고 불리는 드넓은 지대를 가로지른다.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이곳은 밭이 아닌 논이었고, 평야 동쪽에는 자그마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그마한 시내라는 의미로 자구내라 불렸으리라 추측해본다. 40여 년 전 새내기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 농번기에는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했던 이곳이, 더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니.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역사를 나이 들어 알게 되는 기쁨이, 나이 먹는 비애를 반감시켜주기도 한다.

당산봉 봉수대 표지
당산봉 봉수대 표지

수월봉과 당산봉 오름은 1킬로 사이에서 마주 보는 형제오름 같다. 형제도 얼굴과 성격이 다르듯, 당오름이 근육질의 남성상이라면 수월봉은 곡선미 있는 여성상이다. 수월봉으로 향하여 걷던 나는 저만치 특이한 표시판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일렁여 일행에서 빠져나와 표시판으로 향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이곳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안내 글이다. 유물의 모조품이라도 전시된 곳이 있으면 하는 아쉬움 하나 간직했다.

한라영봉과 수월봉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곡예를 즐기며 예전부터 들었던 수월이와 녹고 남매의 애절한 전설을 회상하니 가슴이 촉촉이 젖어왔다. 몹쓸 병에 걸린 홀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남매는 모든 약을 찾아 썼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스님이 남매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가엽게 여겨 백 가지 약초를 가르쳐 주었다. 99가지 약초를 다 캐고 마지막 한 가지 약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수월봉 절벽 중간에 있는 약초를 발견하였다. 수월이는 위험도 잊은 채 절벽중간까지 내려가 그 약초를 캐고, 기쁨에 바위를 잡았던 손이 풀려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녹고는 누나의 시신을 붙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으니, 녹고의 눈물이 바위틈에서 끝없이 샘솟는다 하여 바위틈의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전한다. 이 오름을 녹고오름, 물나리오름, 수월봉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당산봉에서 바라본 자구내 포구
당산봉에서 바라본 자구내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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