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의 시인선](5)천년의 노래를 짓다...서정시인 김소월(1902.8.6.-1934.12.24.)
[이희국 시인의 시인선](5)천년의 노래를 짓다...서정시인 김소월(1902.8.6.-1934.12.24.)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5.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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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서정시인 김소월

유년기 부친의 사고와 죽음 그리고 타고난 천재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관조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루었고, 그러한 모습들을 여성적 정조情調로 표현해 낸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으로 민족의 한과 정서를 표출해내었으며, 대한민국 국민 애송시 1위인 '진달래꽃'을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노래로 작곡되고 불려 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이다.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 탄생과 성장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아버지 김성도金性燾와 어머니 장경숙張景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공주公州김씨 이고 본명은 김정식이며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구군 곽산면 남단동이다. 소월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당시 동경에서 대학을 마친 인텔리집안 이었다.

시인이 2세 때인 1904년 아버지가 음식을 전하려 친척집에 말을 타고 가다가, 정주와 곽산 사이에서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마구 폭행해 머리를 다친 후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아버지는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사람들과도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가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였다고 한다. 이후 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한다. 아버지의 사고 다음해인 1905년 계희영이 소월 집안에 숙모로 들어온다.

그녀는 김억과 더불어 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계희영의 남편은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홀로 남은 그녀는 어린 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동화나 민요들을 자주 들려주곤 했다.

이후 소월은 남산보통학교를 입학,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로 진학한다. 오산학교 재학 도중인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한다.

시인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과 사상적 스승인 교장 조만식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소월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김억이 그를 자신이 참여하던 동인지 <창조>에 소개하여 등단시키려고 하였으나 무명의 10대 소년이라는 점이 내키지 않던 다른 문학가들의 반발이 심했다.

소월의 시를 꼭 책에 싣고 싶던 김억은 어쩔 수 없이 소월의 초기 시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먼저 발표한 것이다. 이후 독자들과 문학가들의 좋은 반응을 얻자, 1920년 창조 5호에 김소월이라는 이름으로 「낭인의 봄」을 비롯한 5편의 시들을 발표하여 소월은 정식으로 문단 데뷔하게 된다.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소월의 장례식 비용까지 다 대준 인물이다.

소월 역시 그런 김억을 존경했으며 소월의 유고 시 「삼수갑산」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시이다.

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고 결국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시집을 가게 됨으로서 끊어지게 된다. 오순은 19세의 나이로 결혼하게 되는데,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다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김소월의 대표 시 중 그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 졌다고 한다.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많은 양의 시를 쓰게 되는데, 이들 시는 훗날 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 잡게 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그사람이여
    사랑하는 그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초혼招魂」 전문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 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귀국한다. 당시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었으나, 가문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로 친지들은 소월을 주목했다.

그로인해 온 집안의 전 재산 중 절반을 모아 소월을 유학 보냈는데, 기대를 다하지 못하고 돌아 온 아쉬움과 자책감으로 소월은 내내 가슴 아파 했다고 한다. 애초에 소월은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유학을 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함께 경성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결국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소월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출판으로 출간하였다.

이후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경영 실패로 광산이 망해버린 후 할아버지 집에서 독립하여 동아일보 지국을 열었다. 시 창작까지 잠시 중단 하면서 신문배포, 수금, 경영 등 모든 업무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으나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온갖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보급소가 문을 닫은 이후 염세증에 빠진 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1930년 이후로는 작품도 거의 쓰지 못하다가 고향 곽산에 돌아갔다. 김소월 1934년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8시, 시장에서 산 아편을 다량 복용하고 뇌일혈로 삶을 접었다. 민족적 천재시인 김소월의 너무나 아까운 이별이었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대량으로 산 기록이 있어서 빈곤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것이 아니냐?”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당시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어서 통증을 견디기 위해 아편을 자주 먹고는 했다고 한다. 결국 자살보다는 누적된 아편 과다 복용의 영향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짐작한다.

2. 문학 활동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그리워」등 다수의 시를 발표하였고, 1922년 배재고등학교 진학 후 『개벽』지를 통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진달래 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4년 이후 김억을 위시한 『영대』동인에도 가입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1925년 시 126편으로 시집 『진달래꽃』을 내며 절정의 작품을 다수 탄생시켰다.

그의 출중한 작품은 시단의 수준을 확고하게 향상시킨 것으로, 한국 시단의 역사에 이정표 같은 구실을 한다.

민요 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操로 풀어내어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생生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 치마」, 「금잔디」, 「달맞이」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 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 원리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르렀고, 시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꽃 촛불 켜는 밤」, 「못 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이별하는 사랑의 원리를 토해내듯 간절히 노래하여 단순한 민요 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적반열에 이르렀다.

7·5조의 정형시로서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암울한 시대 잠겨있던 민족적 정감을 피워내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진달래꽃」 전문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못잊어」 전문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전문

3. 남겨진 이야기

가.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8년 신시 100돌을 기념해 한국일보에서 서울 남산에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 「산유화」가 새겨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 백순재 공편의 『못 잊을 그 사람』(1966)이 있다.

나. 시대와 환경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의 걸출한 민족적 운율은 우리들 가슴에 오랜 메아리로 남았다.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단실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는데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한국전쟁 도중 사망했으며, 3남 김정호는 인민군으로 남한에 왔다가 포로가 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재 입대하였고 전쟁 후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저작권조차도 없었고 모든 혜택이 없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김정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의 병수발을 들어주며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남한에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려 간절히 노력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떠났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자 김영돈 씨와 손녀 김은숙 씨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다. 후손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백방으로 김소월 문학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이를 이루지 못하다가 어렵게 후원자로 나선 이를 찾았다. 2003년 소설가 겸 한의사로 유명한 (사)새한국문학회 경암 김철호 이사장이 김소월의 후손들로부터 2003년 김소월 문학기념사업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2019년 사재 40억원을 들여 충북 증평에 ‘소월·경암 문학관’을 개관했다.

이전에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미스터피자 광고에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받은 약간의 돈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라. 자신의 이름을 알려 준 대표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도, 현재 북한 행정구역이어서 마음대로 갈 수가 없고 안타깝게도 그 지역은 현재 핵 저장시설로 관리되고 있다.

마. 시인의 사진이 거의 남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생전의 시인이 워낙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던 개인적 취향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바.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시인을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가는 길」 전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었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 「개여울」 전문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진 그 내님도
      오늘 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엣 풀이라도 태웠으면!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전문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꿈으로 오는 한 사람』(오세영 편,문학세계사,1981)
    3. 『현대시인 연구』(김재홍, 일지사, 1986)
    4. 『김소월 전집』(김용직,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5. 『한국현대시인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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