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의 시인선](1) 영원한 댄디보이 박인환
[이희국 시인의 시인선](1) 영원한 댄디보이 박인환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4.23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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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이희국 시인
이희국 시인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시절에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의 절정인 19세에 맞은 해방과, 26세에 닥친 6·25라는 대지진을 겪음으로 인해 심각하고 처절한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지만. 선천적으로 가십의 차원이 풍부하고 화려했다.

온갖 탄압으로 인해 한글에 대한 느낌과 감성조차 부족했던 시절, 근대문학은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 극소수의 시인들 밖에 조명 받지 못했으나 그 중에서도 박인환의 감성과 깊이는 한국 근대사 시인 중 단연 으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1. 출생과 성장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박광선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를 하고,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 후 졸업한다.

박인환은 당대 최고의 명문인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하는데, 시인은 이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곤 했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퇴학처리 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한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 동급생이었던 첫사랑 애인의 죽음 앞에 좌절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녀의 유해를 안고 서울로 내려온다. 애인의 유해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죽는 날까지 수시로 방문하였다.

해방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절의 거의 모든 詩人들은 세상을 깊게 통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추상적 울분과 센티멘털리즘으로 방황하였다.

1950년대 격동의 세월 한 복판에서도 박인환은 많은 詩人들 중에서 가십의 차원이 워낙 풍부하고 화려했으며, 서점 “마리서사 시절”의 낭만과 관련된 풍문들, 후반기 동인회를 둘러싼 이야기들, 환도 후 감상적 실존주의와 폐허의식의 물결에 휩싸인 명동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에피소드들, 명동거리 한복판에서 박인환이 즉흥시를 쓰고 그 자리에서 이진섭이 곡을 붙인 작품 “세월이 가면”, 영화광으로써의 면모, 불행한 요절의 이야기들까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극도의 화려하고도 짧은 삶을 살았다.

2.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마리서사’와 주변이야기

박인환 시인
박인환 시인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한다.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여는데,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던 헌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의 시집 “군함 마리”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로 나뉘어 있는데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었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었고,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 일본의 유명한 詩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김광균金光均, 이봉구李鳳九, 김기림, 오장환, 장만영, 정지용, 김광주 등 시인과 소설가들, 《신시론新詩論》 동인 김수영,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등과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 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전쟁이 나고 환도할 때까지 박인환은 대구,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경향신문>의 사회부 기자로 활동한다. 그는 다소 경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활달했지만 재기 넘치는 사람이고, 사람을 끄는 특별한 친화력 같은 것이 있어 주변엔 문인뿐만 아니라 각계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친구들 중에 그보다 십여 년 연장자들이 많은데, 이는 그가 자신의 실제 나이를 숨기고 4-5세 많게 부풀린 탓이다. 박인환이 죽을 때까지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다가 돌아오면 암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시들을 써 내려갔다.

박인환은 그렇게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던 것이다. 詩를 쓰고, 영화평론을 쓰고, <경향신문>과 <평화신문> 등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 노릇을 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수중에 돈도 없고, 집엔 쌀도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것들은 ‘생활적인 직업’이 못되었던 것이다. 전후 폐허가 되어버린 명동은 군용 반합을 들고 구걸하는 거지아이들과 구두닦이, 실직자, 모리배, 사기꾼들로 붐볐다. 거기에 변변한 직장 없이 떠도는 수없이 많은 작가와 화가, 연극인들이 명동으로 몰려와 한데 어울렸다. 그곳에 오면 약속 없이도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고, 재수 좋으면 막걸리라도 한 잔 걸칠 수 있었다.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해 주로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송지영, 김광주, 김규동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가수 나애심羅愛心에게 노래를 청하는데, 그녀는 마땅한 노래가 없다며 청을 거절했다.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가고, 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작곡가 이진섭李眞燮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그 악보를 보고 나애심이 드디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한 시간쯤 지나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테너 임만섭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보며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랫소리에 명동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는 음식점에서 주인의 슬픈 과거를 듣고, ‘밀린 외상값을 갚기 위해 쓴 詩’라    는 유명한 일화가 남겨져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명동은 아직 훈훈한 인정과 친교를 나누는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첨단 유행의 발상지로 사랑을 받다가 1970년대 이후 증권회사들이 들어서며 신흥개발도상국가의 새로운 경제활동의 무대 중심으로 변모했다. 인정과 풍류가 넘치던 명동은 식민지의 애가哀歌도, 토속의 노래도 사라진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가 되었던 것이다.

3. 댄디보이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詩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시인은 여름에도 정장을 곧잘 입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박인환의 모습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그의 실제 발언이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 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잡지 사진으로 보고는 그걸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김차영은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 봄가을엔 우윳빛 레인코트, 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라고 증언한다.

그러한 그의 탁월한 매력에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어이구,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박인환은 통속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 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1955년 그는 대한해운공사에 취직을 하더니 아무 계획도 기대도 없이 ‘남해호’라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갔다.

석 달 뒤에 귀환한 그는「아메리카 시초」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였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장만영은 그의 사후에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라고 회고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목마와 숙녀」 전문

4. 이별 그리고 뒷이야기

그는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걸까. 전화(戰禍)의 황량한 명동거리를 누비며 거침없는 언설과 재치를 뽐내며 시대를 가로질러 가던 시인 박인환,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이봉구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 불과 30세의 나이로 너무나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버지니아 울프 (1882-1941; 모더니즘 작가)의 이별처럼...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10년 전 세상을 떠난 첫사랑이 묻힌 망우리 묘소에 다녀왔다. 이제는 그녀를 위한 詩조차 나오지 않는 자신의 감성을 한탄하며 주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후부터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시작한다.(이상의 실제 사망일은 1937년 4월 17일인데 박인환의 기억이 착오였거나,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핑계였거나....)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애끓는 마음과 사무치는 감성을 이기지 못해 삼일 밤 낮 가슴 깊은 곳까지 술을 쏟아 부었다.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 답답해 !”를 연발했다.

견디지 못한 심장이 마비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 !”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준 것은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詩人葬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암흑기에 태어나 뛰어난 감각과 외모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천재시인 박인환. “목마와 숙녀”, “세월이가면” 등 영원한 불후의 대작들을 남기고 봄이 시작될 무렵 그토록 그리워하던 수목 속으로 떠났다.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나무이야기,2009.9.9.)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두산백과』
  4. 『현대시연구』 (국어국문학회편;정음사1981)

출처 : 이어도문학회 카페

글쓴이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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