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국 시인의 시인선](6) 참여시의 선구자 민족시인 ...참여시의 선구자 신동엽
[이희국 시인의 시인선](6) 참여시의 선구자 민족시인 ...참여시의 선구자 신동엽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5.16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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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국 詩人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신동엽은 김수영시인과 더불어 참여시의 양대 산맥이라 일컬어지지만, 도시적인 김수영에 대비하여 농촌 출신으로 목가적,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지녔다.

주제 면에서도 김수영이 모더니즘적 전통에서 출발해 ‘자유’의 문제를 탐구했다면, 신동엽의 ‘자유’는 서정적이고 자연친화적인 근본 속에서 삶의 체험이 우러나고 녹아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성장하고 외세의 대리전쟁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엔 밀려든 외세의 문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인 우리들의 현실을 겪으며 성장한 시인은 저항하듯 토해낸 뼈아픈 외침을 글로 남겼다.

그가 남긴 시의 품격은 참여적인 강한 메시지와 함께 농밀한 서정성이 바탕에 깔려있어 지금도 독자들의 가슴에 흙내로 다가오고 있다.

1.  탄생과 성장

일제의 수탈이 한창이던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부친 신연순과 모친 김영희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독자였던 그의 부친에게는 전처소생의 남매가 있었으나, 아들이 돌을 넘긴 후 사망하여 신동엽은 2대독자로 태어났다. 시대적 가난으로 인한 극심한 영양결핍으로 아이가 태어나 생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신동엽의 형제도 아래로 일곱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 딸 셋은 일찍 죽고 말았다. 워낙 귀한 아들이라 시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생존해 있던 그의 부친이 생가를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고인이 된 시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형제를 여럿 잃은 그의 유년 시절은 친구들과 뛰어놀기 보다는 혼자서 생각에 잠길 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신동엽은 특히 이복누이인 신동희(1928년 생)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고 하는데, 이는 태어나자마자 친 어머니를 잃은 누이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이기도 했다. 체구는 작고 왜소했어도 정이 많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동료 문인들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1937년 부여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전 학년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어려운 집안 환경으로 학비를 내지 않는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는 일제가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무료로 운영하며, 병영생활과 같이 엄격한 규제를 통해 숱한 제약과 통제를 가하는 곳이기도 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분단 상황과 좌와 우로 갈린 남한 내의 내분 상황에서 그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주사범에서 퇴학당했다. 그러나 그에게 초등학교 교원 자격은 인정되어 부여 인근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지만, 그곳에서 사범학교 시절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람을 만나 3일 만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밭 600평을 팔아 등록금을 만들어 신동엽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시켰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향 부여로 귀향한 그는 민청 선전부장으로 지내다 수복 뒤 국민방위군에 징집된다.

북한의 침공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 온 장정들을 징집해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은, 당시 ‘전시 예비군 체제’로 볼 수 있었지만 식량배급이 거의 되지 않아 불과 100여일 만에 50만 명 중 5만 명 이상이 굶거나, 얼어 죽거나 심한 구타를 당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 가량의 사람들이 폐인이 되다시피 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신동엽은 목숨만은 겨우 건져 귀향조치 되었으나, 너무 굶주린 나머지 민물 게 등을 잡아 생으로 먹고 살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어 고생하였고 훗날 신동엽이 간암으로 요절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다.

전쟁기간 동안 ‘대전 전시연합대학’을 마친 뒤 제1차 공군학도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합격하지만 발령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다 ‘환도 령’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은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헌책방을 차린다.

이시기에 신동엽은 얼마 되지 않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의 내부에 숨겨있던 열정은 이따금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킨다.

2. 시인의 사랑과 생활 그리고 문학

전쟁이 끝난 1953년 초겨울 어느 따뜻한 날 신동엽은 단발머리 소녀 인병선印炳善을 만났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는데 내가 《타임》이나 《뉴스위크》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보았던 것 같았어요. 작달막한 키에 목까지 여민 허름한 군인잠바를 입고 있던 그분은 큰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뿜어져 나오는 체온과 시적 기운이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농촌경제학의 권위자로서 동국대교수로 있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한 인정식印貞植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 3학년 학생이었던 인병선의 말이다.

인병선은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 끝에 1956년 결혼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부여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혼 초기에는 너무나 가난했으나 아내 인병선이 양장점을 개업하면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신동엽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인의 꿈을 키우며 보령군 주산농고에 교사로 취직한다.

그러나 1958년 말 간디스토마가 재발해 각혈과 고열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병을 폐결핵으로 생각한 시인은 학교에 사직서를 낸 다. 아내와 아이들을 서울 돈암동의 처갓집에 보내고 홀로 부여 본가에 남은 신동엽은 병마와 가난 속에서도 독서와 습작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그는 문명과 위선에 물든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한편 원초적인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을 노래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써서 1959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 〈세계일보〉에 「시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시상식 날 나타난 신동엽은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은 완전 촌놈의 행색이었는데, 박봉우시인은 그가 혼자서는 도저히 여관을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가 재웠다고 하며 이 일을 계기로 시인 박봉우와 신동엽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문단에 데뷔했다고 해서 그의 생활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부인 인병선의 회고에 따르면 “결코 훌륭한 남편감은 아니었다. 그는 못 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집안일을 챙기거나 생계문제에 신경 쓰기보다는 마음 맞는 지기들과 술을 마시거나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신동엽은 아버지로서는 더 없이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밤이면 어김없이 한 두 번씩 건너가 세 아이들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부인은 ”....일찍 가시려고 그랬을까, 평생 사랑을 한꺼번에 쏟으려 한 것일까, 그의 가정에 대한 사랑은 지나치다 싶게 지극했다.“ 라고 회고했다. 1960년 건강을 되찾은 신동엽은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셋방을 얻어 가족과 합류한 뒤 〈교육평론사〉에 들어간다.

4월 혁명의 열기를 체험한 그는 그곳에서 『학생 혁명 시집』을 펴내며 문학 쪽에서 혁명에 동참한다. 그는 1961년 명성학교 야간부 교사로 직장을 옮겨 숨질 때까지 8년 동안 교단에 선다.

교사로서 신동엽은 매우 성실한 스승이자 제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체격은 작고 병약했지만 쏘는 듯한 안광만큼은 또렷했다는 그는 집안의 소소한 일에는 등한한 편이었지만 장자로서의 책임감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더 없이 많은 사람이었다. 동생들을 차례로 데려다 공부 시키거나 취직까지 알선해주는 등 오빠로서의 노력과 부모님에 대한 자식 된 도리에도 성실했다.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신동엽은 민족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붕괴되는 과정과 이에 따른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1965년에 집필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최일수의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시의 장르적 변용에도 관심을 보이며 열정을 분출하던 신동엽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문학전집” 제 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시인은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알맹이는 무엇일까, 백낙청은 이 알맹이에 대해 “4·19에서 진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일어섰던 동학 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 이것이 4·19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야 할 알맹이”라고 말한다.

1960년대에 그는 이미 냉전체제의 변경에 위치한 한반도가 처한 국제 정치학적 역학구도 속에서, 중립을 통해 민족 자주의 삶을 구현하자고 말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선보인 ‘알맹이’, 동학혁명과 3·1운동과 4·19혁명을 통해 잉태된 그 ‘알맹이’는 조국의 향기로운 흙 가슴 속에 묻혀 있다가 「금강」에서 찬란하게 부활한다.

「금강」은 4천8백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인데, 1967년 “한국PEN클럽 작가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시작 전집 ”5권 “3인 시집”에 실린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밥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려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 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건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 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 중략.

「금강」은 배다른 누나와 함께 파랑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 양품 장수 할머니를 기다리던 애절한 회상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는 4·19혁명에서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으로, 다시 동학혁명으로 거슬러 오르며 굽이굽이 장강으로 펼쳐진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는 사건을 차례대로 늘어놓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빈번히 오가거나 병치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금강」에서 신동엽은,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으로 불타오른 1894년 동학혁명 얘기를 할 때 실존인물인 전봉준, 최제우, 최해월 등과 함께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켜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금강」의 “서화”에서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누르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라고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새겨놓는다. 「금강」은 당대의 뛰어난 시적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주의와 허무주의, 토속적 샤머니즘에 근거한 운명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 작품이다.

1968년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 집필을 계획하고 자료준비를 위해 임진강변의 문산 등을 답사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전5집으로 구성된 어페라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3. 문학사적 의의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문학평론가 채광석을 필두로 시대적 사명의식과 함께 민족문학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생겼지만, 신동엽은 그런 이론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시 창작을 통해 민족문학을 정립한 선구자였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등 우리민족의 모순된 역사에 대한 저항을 중심으로 민족사의 알맹이를 찾기에 그가 보낸 생은 너무나 짧고도 굵었다. 신동엽의 작품세계를 논하는데 있어서 그의 시가 지닌 참여 의식을 배제할 수는 없다.

김수영이 일찍이 한탄한 바 있듯이 분단 이후의 우리 문단은, “알맹이는 다 가버리고 쭉정이만 남은 상황”이었다. 신동엽의 데뷔작품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시 문단의 시풍과 매우 다르다는 이유로 20여행이나 삭제되는 수모 끝에 당선 아닌 입선으로 문단에 나오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50년대 전후의 한국 시단은 마치 90년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후 창궐했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나 마찬가지로 ‘알맹이는 빠진 허무니 실존이니’를 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국적불명의 외래사조들이 넘치는 시기에 신동엽의 전통적인 서정을 노래한 듯 보이는 시는, 시대에 뒤쳐졌거나 오히려 신선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4월 혁명 무렵의 신동엽은 문단에 데뷔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에게 있어 암울하기만 했던 역사체험 속에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바퀴가 구르는 방향성을 위해, 시인의 풍자와 예언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 그는, 1964년 6·3사태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참여시인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서명에 참여하고 「발」, 「4월을 갈아엎은 달」등을 발표한다. 그리고 1967년엔 그의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와 「금강錦江」을 발표한다.

4. 영원한 이별과 남겨진 이야기

1968년 6월 16일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자 그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던 시인도 1969년 3월 중순 세브란스병원에서 간암진단을 받았고, 결국 치료불능의 이유로 일주일 만에 퇴원조치 된다.

며칠 후인 4월 7일, 신동엽은 문병 온 작가 남정현의 품에 안긴 채 40세를 일기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미처 활자화되지 못한 유작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조국」, 「영影」, 「서울」등이 《고대문학》, 《월간문학》, 《현대문학》, 《상황》등에 발표된다. 1970년에는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에 「좋은 언어」, 「봄의 소식」, 「강」, 「살덩이」, 「만지의 음악」등이 실리고, 부여읍 군수리 나성터 금강 기슭에 그의 시업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진다.

묘지는 처음에는 파주군 금촌면 월롱산 기슭에 안장했다가 1993년에 고향인 부여군 능산리 고분근 근처 산으로 이장했다. 사후 부여 읍내에 있는 생가를 복원하고 2013년 5월 3일, 생가 바로 옆에 신동엽문학관을 세웠다. 한 해 사이로 당대의 한국을 대표하던 김수영, 신동엽 두 분의 참여시인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약속이나 한듯.

신동엽이 죽자 인병선印炳善은  2남 1녀의 교육과 생계를 위해 출판사를 다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틈틈이 남편의 육필원고를 모아 유고집 발간에 힘썼고, 그 결과물로 1975년 6월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 전집』이 출간 되었지만, 불과 한달만에 긴급조치9호 위반의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조치가 내려졌다.

1979년 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는가』, 1983년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 1984년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평전 시선집』, 1989년 시집 『금강』이 잇달아 간행된다.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알기 쉬운 언어로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가 숨진 뒤 더욱 많이 소개되고 높아진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그의 시비에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 「산에 언덕에」가 새겨져 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대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산에 언덕에」 전문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이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문

가. 큰아들 신좌섭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데 그도 학창시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어머니의 속을 긁었다고 한 다. 둘째아들은 광운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을 하며, 딸 신정선은 서울 미대와 독일 카셀대학을 마치고 화가로 활동하다가 결혼한 뒤 캐나다로 이민 갔다.

나. 1982년 12월에 신동엽시인의 문학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역량 있는 문인을 지원하기 위해 유족과 창작과 비평사 공동 주관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이 제정 되었다. 2004년부터는 ‘신동엽 창작 상’으로, 2012년부터는 ‘신동엽 문학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다. 2003년 정부는 신동엽시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 (나무이야기;장석주2009.9.9)

  2.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1975)

  3. 『시인 신동엽』 (현암사;김응교.2005)

  4. 『신동엽』 (민중서관;2002.1.10.)

  5. 『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권영민.1993)

  글쓴이; 이희국 (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 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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