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재학 中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에 읽었던 책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미디어와 SNS의 발달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손쉽게 비교할 수 있게 된 작금의 현실에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저자는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이다.
노벨 문학상은 당대 최고의 문인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하지만, 수상 경력만 언급하고 소개를 마치기에는 그가 남긴 명작들이 적지 않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그려낸 ‘싯다르타’, 한 개인의 내면 성장을 정교하게 묘사한 ‘데미안.’ 그리고 상반된 성격을 가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인물로 진리를 논했던 ‘지와 사랑’까지 헤르만 헤세는 많은 역작들로 현대를 사는 문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여느 작가들이 그렇듯 헤세의 작품들 안에는 그만의 문체와 특징이 내재되어 있다.
소설 ‘데미안’의 서문을 보면 저자는 책이나 별이 아닌 내 몸 안의 피가 들려주는 목소리에서 해답을 찾는다고 말했다.
당대의 많은 소설가들은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다는 관점을 갖고 현실에 있을 법한 가상의 인물을 생성했다.
이에 비해 헤세는 자신의 경험과 내면의 목소리를 인물 묘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점은 헤세의 문체를 심오하고 통찰력있게 만들어주었다.
그의 책을 읽게 되면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철학 혹은 심리학 도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는 헤세의 문장 안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져서이다.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물적인 인물인 요제프 기벤란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고 장사 수완이 좋아서 현실의 삶에 잘 적응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세련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에 매몰되어 사는 한계를 갖고 있다.
반면에 요제프의 아들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한스 기벤란트는 섬세하고 영민한 아이로 여러모로 아버지와는 결을 달리하는 인물이다.
한스 기벤란트는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마을의 아이들은 라틴어 학교에서 졸업하는 것도 힘겨워하지만, 한스는 엄청난 영예로 여겨지는 신학교 입학이 유일하게 가능한 학생으로 평가받는다.
시험은 외형적인 평가 방식에 불과하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구둣방 아저씨를 제외하면 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사람 대부분은 한스 기벤란트가 당연히 신학교에 입학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스 기베란트는 이러한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한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는 등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입학시험에 응시했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
한스는 신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범생의 삶을 살아갔다.
수업과 공부로 채워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수준이 높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어렵사리 경쟁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하일너를 만난 이후로 그의 삶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문학가의 기질과 천재성을 겸비한 하일너는 규율과 관습을 억압으로 여기며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스 기벤란트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고 사회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살았지만, 점점 하일너에게 물들었다.
그는 하일너와 어울리면서 꽉 짜여진 틀과 같은 삶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되고 그동안의 삶이 고통이었음을 자각했다.
사람들의 인정과 학업적 성취로 빡빡한 학교 생활을 힘겹게 버티던 한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을 견딜 수 없게 되고 급기야 학교를 그만둔다.
이후, 한스는 새로운 목표를 쉬이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한스가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우습게 여겼던 고향 친구들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현실이 팍팍할수록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습성이 있다.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하고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들을 배회하는데, 이런 그의 모습이 참 애처로웠다.
그리고 몇몇 장면들에서 한스의 힘든 감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어둡고 슬퍼 보인다는 부분과 아이들이 한 여인의 집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고 반추하는 한스를 보며 그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한스는 아버지의 권유로 이제껏 걸어왔던 삶과 완전히 다른 기계공이 되기로 결심한다.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강한 노동 강도에 손은 금세 엉망이 되었지만, 일요일이면 동료들과 함께 도시로 나가 술을 마시고 어울렸다.
그렇게 찰나의 일탈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는 길.
한스는 내일이면 다시 공장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착잡해 하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사실, 책에서는 과도한 음주로 인한 사고인지 혹은 자의적인 행위였는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후자라고 판단했다.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한스가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성공이라는 기준에만 집중했을 뿐, 내면의 목소리를 도외시했다는 점이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자신을 꾹 누르고 살아가지만, 풍부하면서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한스에게는 맞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집안, 학력, 집안, 배우자, 외모 등 이 세상에는 나를 재단하는 수많은 외부 기준이 존재한다.
나는 한스가 타인의 기대에 둘러쌓인 삶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외부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가 용이해진다.
특정 상태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올라오는 여러 감정은 결국 내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소수의 사람에게만 공유되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가히 정보 호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나와 타인의 삶을 비교하기 쉬워졌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티비에 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 편하게 사는 것이다.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의무와 시선의 덫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