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N]역사 설화와 함께하는 해양문학연구소 설화팀 회원들과 동행..."김통정 장군의 기개 느껴"
[현장N]역사 설화와 함께하는 해양문학연구소 설화팀 회원들과 동행..."김통정 장군의 기개 느껴"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07.31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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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주말을 기다려 왔다. 나를 초대한 사람들과 약속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은 날씨라 조금 일찍 준ㅂ비하고 길을 나섰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였다.

이날 회원들은 코로나19로 인해 4명씩 조를 만들어 움직였다. 인원수를 확인한 설화팀들은 먼저 안오름 주위를 탐방했다. 토성 주위를 돌며 과거에 저항했던 장군들의 기개가 느껴지는 감동을 느꼈다.

이날  순의비, 전시실, 토성, 오방기, 장수물, 옹성물, 구시물,  유수암천, 종신당, 금수못까지 돌며 회원들은 당시 김통정 장군의 활약을 되새겼다.

애월읍에서 만든 역사 설화 스토리텔링의 내용을 음미하며 회원들의 움직임은 바빠졌다. 하나같이 낙오자가 없이 설화팀들의 에너지는 무엇인가 배우고 찾으려는 열정으로 뭉쳐 있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서귀포시 중문동에 거주하고 있는 회원도 있을 만큼 관심과 열정이 더위보다 강했다.

항파두리는 제주시 고성리에 위치해 있다. 고성리는 1리와 2리로 나뉜다. 스토리텔링 책자에 나온 내용을 살펴보면 고성1리 설촌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 원종 12년(1271) 강화에서 반몽의 기지를 들고,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진도에 도읍을 정했다가 진도가 함락됨에 따라 김통정 장군이 잔여군을 이끌고 이곳에 토성을쌓아 방어진을 구축했다. 지형이 분지이고 천연요새지인 항파두성과 강화에서 출발한 항파강의 명칭을 따라 항파두리라 명명했다.

연합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서 옥쇠함으로 그 증거를 밝히지 못하나, 성내골, 성동산 등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를 예측할 수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396호로 복원 외세에 항거한 교육도장이다.

무인지경이었으나 선조 34년(1601) 박언이란 사람이 귀향 와서 설촌하다 뒤이어 김해김씨(1610), 고씨, 조씨, 문, 강씨(1725) 등 다수가 입주해서 마을이 형성됐다.

16세기까지는 귀일촌이었다가 광해군(1609) 때 하귀리, 상귀리로 분리되고 고종21년(1884)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상귀에서 분리, 옛 성터를 따 고성리로 되었다가 1998년 고성2리가 분리되면서 고성리는 고성1리가 되었다.

또한 고성2리는 유래를 보면 행정구역상 애월읍 동남쪽에 위치한 고성리 본동 역내에 위치한 중산간 개척마을이다.

탐라의 얼과 한라영산의 정기를 이어 받은 고성2리는 남쪽에 삼심이오름과 동쪽에 칠성동산, 그리고 서쪽에 극락봉이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 마음을 감싸 않고, 북쪽으로는 수산봉과 파군봉 사이로 푸른 물결 감도는 태평양의 망망대해가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멸쳐지는 천혜의 축복을 받은 곳이다.

고성2리는 고성리 본동과 그 역사적 맥을 같이하고 있으나, 1967년 청정지역 중산간 개발로 이상적인 농촌 건설이란 국가대역사의 중요 시책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조성된 양잠단지가 고성2리의 전신이다.

오늘 탐방한 안오름(安岳)의 유래는 보면 애월읍 고성리 산 1146번지에 있다. 이 오름은 항파두리성 안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안오름 또는 안악이라 부른다.

이 오름을 경계로 토성은 안(서)과 밖(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오름 정상에 서면 파군봉, 도두봉, 비양도까지 조망할 수 있어 망대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른 안오름 전설은 다음과 같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김동정 장군은 항파두리에 도착하여 본영지를 개설, 외성을 쌓기 위하여 성 위치를 답사, 측량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오름 정상을 올라본 것이다. 북쪽은 훤히 트이고 남쪽 기슭은 푹 파이었으며 물이 고여 있었다. 북쪽은 안오름으로 자연적으로 제방이 되어 있었다.

김동정 장군은 축성 책임자를 불러 이곳 흙을 파서 토성 쌓는데 사용하고 흙을 판 후에는 물을 저장하여 유람선을 띄우고 여러 가지 물고기를 방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못이 되었고 주위에는 자당화를 심고 조선공으로 하여금 유람선을 건조시켜 공무에 시달리다 틈이 있으면 이곳에 와서 유람선을 타고 망중한을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통정 장군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술만 마실 것이 아니라, 시라도 읊어야 할게 아닌가?” 이때 시랑(侍郎 한 사람이 "네, 그러면 대장군님부터 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이 사람, 나야 어디 글을 했는가, 싸우는 무술밖에 알지 못하는 걸?" 이렇게 술기운은 올라오고 있지만 시를 읊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삼별초 군사 중에 문인이 없다니." 김통정 장군은 한탄하였다.(이하 생략)

상귀리에 갔더니 극락사가 존재했다.

극락사는 1928년 5월 우수암리 사람들이 봉헌한 극락봉서면 자락에서 1897년 3월에 불법문에 귀의한 백암당 변덕립(邊德立) 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1934년 8월 백암 스님이 입적하여 10여 년 동안 주지 스님이 공석인 가운데 1944년에 범어사에서 수학하던 월명 치붕 스님이 귀향하면서부터 대웅전 30평을 기와로 개축하는 등 증건했으나 4·3사건 때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한다.

2001년에 더응전을 중건하고, 숙광전, 원통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극락사스는 옹성물이 있다. 옹성물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지금의 극락스 경기에 있는 생수로 구시물과 함께 삼발소 군의 식수로 사용했다. 옹성은 무너지지 않는 성인 스가 솟아나는 지형을 보고 붙인 이름인 듯하다. 또 오생물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옹성물의 와음이거나 아니면 거제비, 자귀남귀, 구싯물, 옹성물, 장성물을 합하여 오생물이라 부르다가 다른 물은 독립적인 이름이 붙고 이 물만 오성이란 이름으로 남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생물은 '성 밑으로 나는 다섯 개의 샘물'로도 해석할 수 있겠는데 병사나 사녀는 구싯물을 먹고 이 물은 장관이나 급이 높은 사람들이 전용했다고 한다.

진수(金)못

항파두리성 남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 산심봉 동북쪽에 있는 못(池)으로 삼별초가 금수를 정벌하고 여기다 못을 파 버려 호수처럼 물이 고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금수와 고여임 장군에게 군사 1200여명을 주어 삼별초의 제주 상륙을 저지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1270년 9월에 제주에 들어와서 바닷가 300여리에 환해장성을 쌓고 삼별초와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금수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래서 작전 본부였던 이곳에 못을 파 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산심봉 기슭(진수못 곁)에 금수장군의 묘가 남아있다.

항파두리성 남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 산심봉 동북쪽에 있는 못(池으로 삼별초가 금수를 정벌하고 여기다 못을 파 버려 호수처럼 물이 고였다. 고려 조정에서는금수와 고여임 장군에게 구사 1200여명을 주어 삼별초의 제주 상륙을 저지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1270년 9월에 제주에 들어와서 바닷가 300여리에 환해장성을 쌓고 삼별초와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금수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래서 작전본부였던 이곳에 못을 파 버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산심봉 기슭(진수못 곁)에 금수 장군의 묘가 남아 있다.

회원들은 오늘 많은 곳을 탐방하면서 또 다른 내일을 약속했다. 다음엔 더 멋진 곳을 탐방하기로. 비가 왔다. 헤어지는 와중에 동문시장에 화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비가 오는데 걱정을 앞세우며 산에서 내려 왔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해양문학연구소(소장 장영주) 설화팀 회원들이 7월 마지막 날인 31일 오전 10시에 고성리 항파두리 주차장에 모여 탐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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