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4.3제주인을 구하려던 오스카 쉰들러, 영화 속 변호인, 朴哲변호사
[이슈]4.3제주인을 구하려던 오스카 쉰들러, 영화 속 변호인, 朴哲변호사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03.31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녕 출신, 빨갱이라는 오명을 들어가며

역사는 흔히 많은 민중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남기며 흘러간다.

굵직한 세계 역사 속의 민중들도 그랬지만 제주 4.3은 제주인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4.3 당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제주인들이 무죄 판결’을 받아 오랜 세월의 더께를 벗고 있다.

그들은 이승만 독재정권과 군사 독재를 이어오는 동안 ‘죄 아닌 죄’로 고통 받았을 뿐 아니라 자녀들마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생활하기 힘든 모습을 가슴이 타들어가는 심경으로 지켜봐야 만 했다.

‘이제라도 다행’이라고 바튼 한숨을 쉬지만 ‘오랜 세월 그들을 짓눌러온 만행’에 대해서는 차마 이야기하기조차 힘들다.

그 시절, 억울하게 빨갱이로 지목받아 제주가 아닌 물설고 낯설은 다른 지방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기꺼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제주인 옆에서 너도 빨갱이라는 모욕을 들으며 그런 제주인들을 지켜내고자 했던’ 제주 출신 변호인이 있다.

그는 구좌 김녕 출신의 박철(朴哲)변호사(1914~1950)였다.

오스카 쉰들러, 영화 속 변호인, 그리고 박철 변호사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는 체코출신 나치당 당원인 사업가 였다.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군납 사업가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으나 수 많은 유태인들을 구하게 위해 모든 재산을 써버렸다.

그 탓에 사업에 실패하고 불운한 노년을 지낼 수 밖에 없었고 그가 구출해 준 유태인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은 부림사건에 연루된 청년들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다 결국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마저 구속되는 처지에 빠졌다.

변호인은 자신의 소망대로 청년들을 무죄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변호사로 모른 체 하고 지냈으면 잘 살았을 현실을 뒤로 하고 고난의 길을 갔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또 한사람, 4.3 당시의 제주출신 박철 변호사.

그는 4.3으로 인해 제주사람 118명이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서울 변호사 생활을 중단하고 동료 변호사 몇 몇과 광주로 향한다.

박 변호사도 변호인의 ‘그 변호사’처럼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워낙 엄혹했던 시절.

이후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야 했던 박철 변호사와 그의 가족들

해방 정국의 엘리트인 변호사에서, ‘빨갱이 누명을 쓴 제주인들을 구하고자 했던 변호인’으로, 다시 6.25전쟁 당시 납북을 당했지만 제주인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자진 월북일 수도 있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이 그의 가족들과 후손들도 그늘에 묻히게 된다.

1914년 김녕에서 태어난 박철 변호사는 1950년 납북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인들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납북 당하기 직전에도 그는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모든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광주법원에서 변호사로 자임했던 박 변호사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변호인보다는 국회의원이 세상을 바로세우기에 알맞다’고 여긴 것 같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그는 낙마하고 만다.

돈 없고 힘 없는 남로당 출신들, 제주 4.3 수형자들을 무료 변론한 댓가는 박 변호사의 집이나 선거 사무실 벽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했고 당시 제주인에게 그 단어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 부인하지 못하는’ 그 자체였다.

이후 서울로 돌아간 박 변호사는 6.25을 맞았고 그 와중에 납북됐다.

이젠 남겨진 가족들이 문제였다.

2남 4녀의 큰아들도 그의 삶을 이겨내야 했다.

박변호사가 납북 됐던 1950년 집안 장손인박동광(朴東光)씨(1932~1991)는 배제중학교 5학년이었다.

부친이 인민군에 의해 납치. 행방불명되자 동광씨는 부친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어린 동생들을 두고 군 장교로 입대한다.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미국 고등군사반의 박동광씨(왼쪽). 납북된 아버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군 장교로 자원입대 한다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박철 변호사의 아들 박동광씨는 엘리트 장교였지만 소령에서 뜻을 접어야 했다

미국 오클라호마에 있는 미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이수하고 엘리트 포병장교로 근무했다.

그러나 고향에 있던 조부모님들은 아들이 행방불명된 상태에서 손자마저 어찌 될까 봐 예편을 애원했다.

박 변호사의 손자의 박용창씨(62. 서귀포시 거주)는 “안위도 문제였겠지만 납북 당한 인사의 아들이 군대에서 진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제주인들을 변호하다 납북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마도 군대내에서도 상당한 감시의 대상의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토로했다.

미국 고등군사반을 수료한 우수했던 군 장교가 소령으로 군문을 떠나야 했던 이유로 짐작할 수 있다.

곳곳에 남아있는 박철 변호사의 흔적들, 제주인은 그를 기억해야 한다.

박 변호사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했다.

해방정국 서울에서 변호사와 국민대학교 교수 등을 지내며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삶을 살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무료변론해 주기도 하며 살던 그에게 전해진 것은 고향 제주의 끔찍한 4.3 소식.

고향 사람들이 포승에 묶여 광주 법원에서 변호사도 없이 재판을 받는다는 말을 접한 그는 주저 없이 광주로 향했다.

4.3 제주인 변호, 국회의원 출마 낙선, 납북 등으로 기억되는 그의 삶은 끊긴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남겨진 기록은 그의 삶을 겨우 되살리고 있다.

2002년 발간된 서울제주도민백년사는 박철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제주도민회가 펴낸 이 기록의 제우회(濟友會)결성 난을 보면 해방 다음해인 1946년 4월경 종로소재 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박철(변호사. 납북), 오건일(변호사. 납북) 등 재경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발족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회장에는 장홍상(張鴻想)이 추대됐으며 부회장에는 문시혁(文時赫. 전 창경원 원장),고문에는 오용국. 홍순녕. 김대봉 등.

알만한 해방 정국의 쟁쟁한 제주인들이 거의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공간의 주요 인물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정계를 비롯해 관계, 학계. 실업계, 법조계, 교육계, 여성계, 종교계 등으로 나뉘고 박철 변호사는 법조계 인물로 분류됐다.

법조계를 따로 정리한 페이지를 보면 ‘제주도의 사법’이라는 소제목 아래 해방 후 일본법조인이 물러나자 미군정청은 제주법원장에 최원순(崔元淳), 검사국 검사장에는 양홍기(梁洪基), 검사에는 박종훈(朴鍾壎), 법원서기장에는 김태준(金泰俊)을 임명했다.

김태준을 제외한 3명은 일제강점기 말 제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해방 이후 이들이 판.검사에 임명되면서 한 때 제주에는 변호사가 한명도 없는 사태가 연출되기도 했다.

박철 변호사에 대해서는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 시험 사법에 합격한 후 오사카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교포들의 권익옹호에 힘썼고 해방 후 서울에서 변호사와 대학교수로 활동했다.

4.3 사건 후 관련자 118명이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오건일(吳健一) 변호사 등 6명과 함께 변론활동을 폈다고 전하고 있다.

남겨진 가족들의 삶, 자랑스러우면서도 불안했던,,,

6.25 당시 납북인사라는 사실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큰 멍에가 됐다.

미국 고등군사반을 나왔고 6.25 참전 대한민국 무공훈장을 받았으면서도 소령 예편을 해야 했던 박 변호사의 아들, 그런 가족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주위의 불편한 시선에 결코 자유스럽지 못했던 후손들.

박 변호사의 손자인 박용창씨(62. 서귀포시 거주)는 아주 담담하게 70년 넘는 세월을 되짚었다.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서귀포시에 사는 박용창씨.

서귀포시에 사는 박용창씨, 박철 변호사의 손자인 그는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가슴에 걸리는 대목은 납북인데, 강제냐 혹은 자진인가 하는 문제.

가족들은 당연히 강제납북이라고 여겼지만 정부는 인정해주지 않았다.

북으로 넘어간 가족이 1명이라도 있을 경우 온갖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던 시절에서 그냥 넘길 수도 없는 문제였다.

남겨진 가족들은 꾸준하게 강제납북을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호소했고 이산가족 찾기도 신청했다.

정부는 별반 대답이 없다가 2017년 4월에 강제 납북이라는 증서 한 장을 보내줬다.

박용창씨의 아버지와 그의 자식들이 조마조마하면서 보내야 했던 세월은 이미 저만치 흘러가 버린 뒤였다.

해방직후 변호사로 국민대 교수를 역임했던 박철 변호사(앞줄 가운데)
70년이 지나서야 받은 납북피해자 결정서

박씨는 “4.3 소식이 뉴스에 나오면 귀가 쫑긋 한다”면서 “특히 최근 4.3으로 인해 억울하게 범죄자로 낙인 찍힌 도민들이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든다”고 밝혔다.

이어 박씨는 “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당시 담벼락에 써진 빨갱이라는 글자를 직접 본 친척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세월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참 존경스럽다”며 “손자대에 와서는 직접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2017년 강제납북 증서를 받기 전까지 가슴 한 켠에는 묵직한 그 무엇이 있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젠 옛날 얘기지만 과도한 공권력에 의해 스러지던 제주인을 일으켜 세우려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며 “4.3은 가해자와 피해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제주인의 피가 흐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겨진 역사”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기사제공=이슈제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