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CEO 송경애 칼럼](2)나는 99번 긍정한다 ...스물 다섯, 나의 선택
[행복한 CEO 송경애 칼럼](2)나는 99번 긍정한다 ...스물 다섯, 나의 선택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6.18 0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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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시대의 경제인
행복한 CEO송경애 성공 이야기
끊임없이 긍정하고, 또 긍정하라

긍정적인 마음은 낙관적인 마음가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신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성공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삶도 풍성함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주 '행복한 CEO 송경애 칼럼'을 통해 소감을 묻는다면 행복바이러스를 많이 전파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CEO 송경애 대표이사의 칼럼에서 프롤로그 내용만 읽었는데도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속으로 생각하면서 자세히 읽어봤다.

그러면서, 도대체 송경애 대표는 어떤 분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런데 명함을 봤는데 '송경애'라는 이름과 함께 '송주온'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사연이 있었다.

Some make it happen, Some watch it happen,
And some say "What happened?"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말합니다)

"아직 호적 이름은 송경애이구요. 송주온이라고 부릅니다. 주온은 호로 받았는데... 그럴만한 일이 몇년 전 있었지요."

바로 송경애 대표의 이름을 도용해서 페이스북이나 밴드를 만들어 'BT&I 송경애'라는 닉네임으로 가입하여 투자권유나 도박사이트 가입 권유 등의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호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 

성공한 CEO는 많지만 행복한 CEO는 많지 않다!

송경애 대표는 여행업이라는 틈새시장에서 성공하기까지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은 '내일은 반드시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을 주었고 위기를 견디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덕분에'라고 감사하고, '때문에'라고 남을 배려하면서 나눔과 봉사 활동을 통해 행복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도 긍정의 힘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이책에서는 끊임없이 긍정하고 또 긍정할 때 불행을 행복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가?"
그 답이 이 안에 있다. 행복한 성공을 위한 43개의 멘토링.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앞으로 매주 만나게 될 '행복한 CEO' 송경애 대표이사의 스토리. 많은 필독과 응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김만덕의 나눔과 도전정신의 세계화를 위한 ‘김만덕국제상’ 제정 추진이 31일 열린 제18회 제주포럼에서 제시됐다
송경애 대표 (화면 얼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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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나의 선택

둥지에서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나는 법을 알았을 때 둥지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지금껏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알에서 벗어나 자신의 든든한 둥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향해 발 빠르게 내달려야 한다.

나 역시 그동안 안주해 왔던 삶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25세가 되었을 무렵 알게 되었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내 꿈을 찾아 힘찬 날갯짓을 서둘렀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행이었지만 말이다.

경애야, 아버지가 결혼하라신다."

1986년 9월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를 불러 조용히 하신 말씀이었다.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부모가 어렸을 때부터 정해준 혼처에 맞춰 결혼을 하라니! 그것도 미국이란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혼을 해야하다니!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결혼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이 되는 집안 분위기라,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을 해야 할 현실이 버티고 있을 뿐 내 의지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했다.

내게도 펼쳐보고 싶은 꿈이 있는데, 기껏 공부해 온 것은 무엇이며 독립할 요량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것은 또 뭐란 말인가. 결혼해서 못할것도 없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아버지는 내가 아들이었어도 이렇게 하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여자로 산다는것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물론 아버지는 딸을 잘 키워서 좋은 배우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라고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뜻을 펼쳐보고 싶었다.

이런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일사천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청첩장까지 나왔다.

'여기서 결혼하면 내 인생은 끝이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만일 내가 집에 그대로 머무르게 된다면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일단 이 상황을 피해보자는 생각이 번뜩 스쳐지나갔다.

송경애 저, '나는 99번 긍정한다'
송경애 저, '나는 99번 긍정한다'

마침 아버지가 출장을 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은 터라 기회는 이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에 1만 달러를 챙겨들고 차를 몰고 나왔다.

그때로서는 딱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하지 않고, 닥친 상황만 모면하자 싶어 나왔는데 갈 곳이 없었다. 미국이라는 넓고 넓은 땅에서 내 한 몸 의지할 곳이 없었다.

차를 몰고 한참 달리다 보니 어느 새 공항 앞이었다. 그래도 내가 숨쉴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한국행 편도 항공권을 손에 쥔 순간 그제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워싱턴에서 한국으로의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부모 형제를 떠나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성공하지 않는 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최대의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뜻을 두 번이나 거역하면서 한국행을 택했다. 중학교 때 이민 와서 굳이 한국의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겠다고 해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설득을 해서 허락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을 뿐더러 몰래 도망 나온 꼴이 되어 버렸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두 갈래 길에서, 내 의지대로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길이 험난한 여정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길을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 순간 홀로 부딪치면서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갈 일이 두려웠지만 내가 결심한 이상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 나왔다. 나를 다그치는 말을 주문을 외듯 말하며 긴 비행시간을 견뎠다.

한국에 도착해 내 모습을 보니 가관이 아니었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한국에 갈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달랑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었다. 한국으로 오기는 왔지만 막상 너무 막막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당장 살 집을 구해야 했고, 옷가지도 사야 했다. 혼자 살아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두려움과 슬픔이 엄습해 왔다.

'할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할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친척들이 한국에 있었다. 혼자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야, 내가 어른들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는 순간 독립을 포기하는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굳이 한국행을 감행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홀로서기를 해보려는 목적이었는데, 처음부터 약해빠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나약해진 내 자신에게 용기를 주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불안을 떨쳐 냈다.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공항에 주차된 차를 가져가라고 차 열쇠를 보냈다. 그것은 내 독립의 의지를 전한 출사표였다.

우선 거처를 구한 후 일할 곳을 찾아보았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때 통역 등 파트타임을 했던 곳을 찾아다니며 직장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라호텔의 VIP 코디네이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살다보니 영어는 문제될 것이 없었고, 예전부터 호텔과 여행업에 종사하고 싶어 했으니 내게 딱 맞는 일이었다.

한때 외교관이 꿈인 적도 있었지만, 내 성격상 정부 조직의 공무원보다는 민간 외교관이라 불리는 호텔이나 여행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인종이나 남녀의 성차별이 비교적 적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짬짬이 호텔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도 했다. 식음료 서빙도 하고, 호텔 바에서도 일을 했다. 호텔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서 예약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어렵지 않게 신라호텔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출근 전 옷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갔다. 미국에서 옷가지를 챙겨오지 못해 시장을 찾았는데, 나를 옷장사로 여기며 어디에서 장사하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냥 둘러댄다는 게 이태원이라고 했더니, 그 뒤로는 나만 가면 '이태원 언니'라고 불렀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여행사를 경영하면서 직원들 유니폼도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일에 대해 연연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무작정 한국으로온 일이 무모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 인생의 최대 기로에 서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먼저 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다. 20대에 했던 고민을 지금도 변함없이 하고 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래서 '~했더라면'이라는 가정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닥치는 시련 속에서 결정하는 선택은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초석으로 여긴다.

과거에 연연하거나 내 선택에 대한 후회는 내가 비상할 수 있는 기회의 날개를 꺾는 일이다. 스스로 도태되는 새가 되지 않으려면 일단 날아서 희망의 빛을 찾아가야 한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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