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개정판 '제주도 신당 이야기'
[신간]개정판 '제주도 신당 이야기'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1.20 0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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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하순애|150*220|338쪽|20,000원 / 979-11-6867-153-9 [03380|한그루|2024.1.19.
사람살이, 세상살이를 성찰하는 철학자
​​​​​​​제주 신당에 담긴 시간을 말하다
[신간]개정판 '제주도 신당 이야기' 표지
[신간]개정판 '제주도 신당 이야기' 표지

지난 2008년 제주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된 <제주도 신당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초판 발간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최근의 변화상을 반영할 필요가 있겠으나, 신당을 소재로 한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기존 내용만으로도 독자에게 의미 있는 책이라는 점, 그리고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 자칫 전체 글의 결을 흩트리게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초판의 내용을 유지하면서 만듦새를 새로이 하는 방향으로 재출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간 절판된 이 책을 찾는 독자들이 많았기에,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양서를 복간한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40여 곳의 제주 신당을 34꼭지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민속학자나 구비문학 전공자들과는 달리 철학자의 시선으로 제주의 신당을 바라본다. 

신당을 관찰하고 그에 얽힌 특별한 서사들을 살피지만, 그것은 제주인의 삶과 문화, 즉 사람살이와 세상살이에 대한 성찰을 풀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시간과 공간, 문화와 역사, 신화와 신앙, 욕망과 상징 등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신당을 소재로 삼아 이야기로 풀어놓고 있다.

신당은 신이 좌정해 있다고 관념하는 장소다. 특히 제주 신당은 제주인의 삶과 문화가 녹아 있고, 제주의 역사적 시간이 내려앉은, 질곡 속에서도 삶의 건강성을 담보해온 지혜가 축적된 공간이다. 

신당의 신에 의지하며 삶의 애환을 풀어내던 세대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이고, 개발 바람 속에서 이미 사라진 신당도 다수이지만, 여전히 신당은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두꺼운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제주문화로부터 사람살이를 읽어내는 창(窓)이기를, 당신앙과 신화가 생생히 살아 있는 제주문화에 대한 관심을 희망”하는 저자의 바람대로, 새 옷을 입은 이 책이 삶의 성찰과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여러 겹의 파장으로 새롭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 저자 소개

글. 하순애

30여 년간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했으며, 철학적 사유를 대중과 나누기 위한 시민 강좌 및 제주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교양철학』(공저), 『철학으로 세상 읽기』, 『제주도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공저), 『한국인의 생명관과 배아복제윤리』(공저), 『한국인의 죽음과 생명윤리』(공저), 『제주여성의 삶과 공간』(공저), 『제주도 신당 이야기』, 『세상은 왜?-세상을 보는 열 가지 철학적 주제』 등이 있다.

■ 차례

1장 원초적 공간의 메타포

동굴, 그 신비한 어두움-서귀포시 보목동 〈조녹잇당〉

바위그늘 집자리인가, 큰 집인가-서귀포시 중문동 〈도람지궤당〉, 애월읍 상귀리 〈황다리궤당〉

제주의 원형질 공간을 살려라-한림읍 금릉리 〈능향원〉

2장 돌담과 바위가 만드는 성소

바위에 올라 바다와 만나는 잠녀(潛女)들의 마음-서귀포시 대포동 〈잠녀당〉

미륵돌의 영험-구좌읍 김녕리 〈서문하르방당〉, 제주시 화북동 〈윤동지영감당〉

바람코지의 아름다운 돌담은 신의 집-구좌읍 세화리 〈갯곳할망당〉

3장 뱀, 그 신성한 상징

바닷물에 떠밀려 온 상자 속의 뱀신-한경면 고산리 〈당목잇당〉

한과 설움이 가득한 마을-표선면 토산2리 〈알토산한집〉

목숨과 곡식을 건져주는 사신(蛇神) 할망-제주시 내도동 〈두리빌렛당〉, 조천읍 조천리 〈새콧당〉

4장 사랑의 변주곡

영원한 삼각관계의 딜레마-서귀포시 〈서귀본향당〉, 〈서홍본향당〉, 〈동홍본향당〉

남편감 후리는 정좌수 따님애기-한림읍 금악리 〈도신마를당〉

만남도 헤어짐도 어려워라-구좌읍 월정리 〈월정본향당〉

 

5장 만남과 부정한 이별

쫓겨나는 하르방신-구좌읍 송당리 〈송당본향당〉

돗고기 부정과 바람알로 쫓겨나는 할망신-조천읍 와흘리 〈와흘본향당〉

그래도 당당한 할망신의 위세-구좌읍 평대리 〈수데깃당〉

6장 한 많은 넋을 달래다

희생물로 바쳐진 어린 소녀-성산읍 수산리 〈진안할망당〉

해마다 새 옷으로 단장하는 신목-성산읍 신천리 〈현씨일월당〉

남자들이 쳐다볼 수 없는 당-조천읍 신흥리 〈볼래낭할망당〉

7장 신상(神像)을 지켜라

우리 마을 지키는 부처님-성산읍 수산리 〈울뢰모루하로산당〉

설촌(設村)자의 집터에 앉은 황서국서어마장군님-성산읍 삼달리 〈웃카름당〉

제주섬에 내린 옥황상제따님애기-조천읍 와산리 〈눈미웃당〉(불돗당)

8장 조상이 신이요, 신이 조상이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 신의 세계-애월읍 수산리 〈서목당〉

이웃의 조상은 모두의 조상신-조천읍 함덕리 〈산신당〉

운명을 달리해도 신통력은 변함없어-조천읍 함덕리 〈존하니모루당〉, 〈한영할머니당〉

매사를 당할망에게 고하라-안덕면 대평리 〈난드르일뤠당〉

 

9장 신력(神力)도 사람 하기 나름

심방과 신의 위세는 동전의 양면-구좌읍 한동리 〈한동본향당〉

동티, 그리고 신과의 화해-안덕면 사계리 〈개당〉, 제주시 오라동 〈도노미본향당〉

신당 가는 길도 편리해야-서귀포시 법환동 〈앞본향당〉

10장 역사에 대한 다른 기억

욕심 많은 김통정-애월읍 고내리 〈큰당〉

현감이 신당에 절하다-표선면 성읍리 〈안할망당〉, 〈윤남동산쉐당〉

당 오백, 절 오백을 부순 이형상 목사

11장 신을 저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 마을의 당이 ‘센 당’

타지에서도 태생마을의 당신을 모신다

신당에서 유교식 마을제를 지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필자는 제주 출생이 아니다. 부산에서 성장한 필자는 1982년 겨울,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다. 부산 도심에서 자랐으면서도 도시의 번잡함과 불화했던 필자에게 제주도는 낭만의 땅이었다. 한 발치만 나서면 천연의 숲이 있고 바다가 있는 제주의 풍광, 고개를 돌리면 어디서나 바라다보이는 한라산, 더욱이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 위엄이 있으면서도 푸근한 품새가 느껴지는 한라산 자락은 그 품에서 삶을 꾸리고 싶다는 꿈을 꾸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막상 일상에서 낯선 가치 감각, 낯선 감정과 낯선 행동양식을 마주하는 일은 때로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제주어보다 더 낯설었다. 또 그것은 육지부의 다른 지역문화를 접했을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이질감이었고 문화적 충격이었다. 무엇일까? 나 스스로 이방인처럼 느끼게 하는 이런 이질감의 뿌리는 무엇일까?

제주문화의 특이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저술과 논문들을 게걸스레 읽어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즈음 우연히 만나게 된 신당이 너무 흥미로웠던 필자는 다른 신당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신당들과 신앙민을 만나면서 나의 궁금증은 보다 선명한 과제로 다가왔다. 그것은 제주문화를 형성해 온 제주의 사회심리, 달리 말하면 제주인의 심리적 하부구조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사회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으나, 우선적으로 제주도에서 전승되어 오는 신앙을 연구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신앙은 지역의 정신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통로라는 점이 연구 방향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었다.

시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독해하고자 한 철학도로서 필자는 ‘특정한 문화의 구조가 특정한 정신의 구조 및 인간 활동에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늘 지니고 있었다. 이 문제의식이 제주문화를 경험하면서 구체적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낸 셈이다.

돌이켜보면, 신당을 찾아다니고, 마을 사람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시간들, 사람들과 더불어 신당기행을 하던 시간들은 ‘전승이 말 걸어오는 것’을 듣는 시간이었다. 또한 신당에 두껍게 내려앉은 역사적 시간의 갈피들을 유영하는 시간이었다.

■ 책 속에서

이런저런 경계는 모두 사람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조녹잇궤 입구를 막고 서 있는 철문을 경계로 일상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이 나뉘더니, 다시 굴 안에서는 제단을 경계로 사람이 설 자리와 신의 자리가 나누어진다. 

우리에게 장소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철문이나 시멘트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제단이 무슨 대단하게 두려운 경계가 될까? 언젠가 이곳에 왔던 어느 선생은, 조녹잇궤 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멀찌감치 조녹잇당이 보이는 지점에서 이미 써늘한 기운을 느껴 진저리치더니만, 그 후 일주일을 앓아누웠다고 하니, 그 사람에게는 조녹잇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경계였던 셈이다. (22-23쪽)

언제 적인지, 넉넉한 품새의 바위를 이 자리에 놓아둔 그때로부터 숱한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저마다 시름을 이곳에 풀어놓았을 것이고. 그렇게 시름을 풀어놓게 한 힘은 서문하르방이 변하지 않는 시간으로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위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이고 변하지 않는 시간이다. 아니면 바위는 아예 시간을 뛰어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바위에다 ‘의미의 옷’을 입혔을 리가 있으랴. 그러지 않고서야 이 땅 곳곳에 신비롭고 거룩한 존재로 섬겨지는,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 숱한 바위를 설명할 도리가 있으랴. (58-59쪽)

〈두리빌렛당〉의 당신인 용녀부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뱀신이다. 〈새콧당〉의 당신인 고망할망은 나주 땅에서 바다를 건너온 뱀신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뱀 혹은 구렁이는 하늘과 인간의 세상, 뭍과 바다, 바다와 배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로 상징되고 있다. 넘나든다, 건너간다는 것은 그 어떤 의미로든지 초월이다.

 그리고 인간적 삶의 현실에서 가장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 역시 초월이다. 삶의 현실은 서로 다른 세계들이 얽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들을 잘 넘나드는 것,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세계를 잘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고 사랑하는 것 모두가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세계를 미끈하게 넘나들 수 있는 존재는 사람에게 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107쪽)

신년과세제인 정월 열나흘에는 육지부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재일교포가 참여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당굿의 시작이 늦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육지에서 오기로 한 신앙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신앙민은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부산서 왜 늦는가.”라는 걱정스런 말을 할 뿐이다. 가히 신앙공동체이다. 사회변화 속에서 당신앙이 급속하게 퇴색되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구좌읍 월정리는 당신앙이 상당히 견고하게 지속되는 곳이다. 혹 부부신의 끈끈한 정이 신앙심에도 작용하는가? (135쪽)

열다섯 고운 나이에 몹쓸 남자 때문에 죽어간 박씨할망, 애통한 한을 지닌 할망의 영(靈)이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죽음의 자리에 마련한 당이 바로 〈볼래낭할망당〉이다. 이런 터이니, 이 당에는 어떤 남자도 얼씬거릴 수 없거니와, 당 앞을 지날 때라도 남자는 당 쪽으로 고개조차 돌려서는 안 된다. 

남자는 당을 쳐다보는 것조차 안 된다는 금기, 그것은 남성의 폭력성에 노출될 위험성을 늘 느끼는 여성들이 공감적으로 만들어낸 상징적 처벌 아닐까? 또 그것은 어떤 여자라도 박씨할망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상징적 경고 아닐까? (183-184쪽)

신앙민에게 목 없는 신상은 그 자체가 영험함이다. 1970년경 미신 타파라는 말이 떠돌 즈음에, 입대를 앞둔 동네 젊은이들이 장난삼아 신상의 목을 빼어갔고, 그 후 그런 장난을 쳤던 젊은이들이 죽었다 한다. 

이쯤 되면 신앙민은 당신의 영험함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나이 든 신앙민은 목 없는 신상을 서슴없이 ‘마을 지켜주는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들에게 불교나 무속 따위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실제로 당굿에 참여하는 신앙민 대다수가 사월 초파일에는 사찰에 가서 축원하는데, 이들에게 사찰에 있는 불상과 〈하로산당〉에 있는 신상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온 가족의 제액초복을 비는 마음은 똑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당굿이 시작되면, 당신에 대한 신앙민들의 호칭은 일시에 통일된다. 〈하로산당〉의 신은 부처님이 아니라 ‘조상님’인 것이다. (193-194쪽)

빈부귀천으로 사람값을 매기고, 차별하고 차별받는 세상살이도 갑갑한데 죽은 혼령의 세계에까지 지위와 신분, 계급을 따져 대우를 차별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생전의 빈부귀천으로 조상신의 영험을 가늠하지 않는 제주 땅의 무신 세계가 훨씬 낫지 않은가! 살아서 권력 있는 자들에게 억눌려 산 것도 억울한데, 죽어 귀신이 된 후에도 생전 권력을 이어 강자 행세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할 일이겠는가! 

그래서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는 제주 땅의 조상신의 세계는 호쾌하다. 귀신세계에라도 억압과 차별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갑갑한 세상에 숨통을 틔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219쪽)

마을청년회에서 축구시합할 때도 〈할망당〉을 찾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대평리 젊은 사람에게 〈할망당〉의 내력을 아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몰라! 왜, 알아야 해? 그냥 조상할머니잖아?” 이보다 더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믿음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다. 그냥 믿음으로써 대평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젊은이의 말을 들으며 할망당의 당신이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를 궁금해하던 나 자신이 일순 머쓱해졌다. 그러나 어쩌랴, 나라는 사람은 기껏해야 관찰자일 뿐, 결코 대평리 사람이 아닌 걸 말이다. (238-239쪽)

성읍리 사람들은 현감이 〈쉐당〉 앞에서 내려 절하고서야 지나갔다는 전승되는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당연히 〈쉐당〉은 말에서 내려 당신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말이 발을 절 정도로 ‘센 당’이라는 인식도 공유한다. 말이 발을 전다는 것은 그 말을 탄 사람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한양에서 부임하는 관리일지라도 성읍리 당신에게 굽히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러니 신당에 절을 하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신당에 절을 하는 현감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알까. 참으로 말이 발을 절까 두려웠을 수도 있겠고, 기왕에 부임하는 마을의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성읍리 민초들은 말에서 내려 절하는 현감을 다행스럽게 보았을 수도 있고, 괜스레 어깨가 으쓱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렇게 서로 속내를 잘 모른 채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적당히 영합하는 게 정치이고 또 정치의 기술 아닌가. (286쪽)

본향당 본풀이에 후렴구처럼 구송되는 구절을 보라. “생산, 물고, 호적, 장적 차지한 본향한집님”이다. 이렇듯 마을의 모든 것을 관장하여 마을을 돌보아주는 본향당신을 마을 사람들이 ‘세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한 여기서 이웃 마을의 당신이 어떻게 영험한지는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속적 사유에 있어서 마을은 그 자체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무속에 있어서 현실적 공간인식은 가정과 마을을 경계로 ‘안’과 ‘밖’이 구분된다. 가정과 그 가정이 있는 마을은 개개인에게는 생명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택과 안녕을 기원한다. 마을굿은 마을수호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다. 이때 마을은 온전한 하나의 세계이고, 마을 밖은 다른 세계이다. 이러한 공간인식에 따라 마을 밖의 신령들은 다른 세계의 신으로 관념된다. 이러니 어떻게 신의 영험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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