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진 변호사 칼럼](8)1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장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8)1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장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10.0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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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허용진 변호사는 서귀포시 서호동 출신으로 서호초등학교와 남주중·고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인 198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천·울산·광주·서울동부지검 검사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 특별수사관,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의정부지검 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의정부와 서울 등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14년 서귀포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으로 4년을 쉬고 노동 현장에서 막노동부터 양봉업까지 하다가 다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입학 후 성적은 맨 밑바닥에서 점점 상승해 결국 장학생까지 되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 것을 허용진 칼럼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노동만 하다가 공부로 다시 목표를 잡으니 거기에 두세 배를 더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어렵지만 쉽게 이겨내고 적응하려고 한다. 우리들에게 힘든 일이 닥쳐와도 잠시만 시간 지나면 순조로운 일상으로 변한다.

허용진 변호사의 칼럼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가능성에서 살고 있다고 본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허용진 변호사의 성공 스토리,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허용진 국민의힘 도당위원장

1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장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누구나 일정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가 흔들릴 때가 있다. 나는 이럴 때 항상 어려운 생활을 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떠 올리면서 스스로 채찍질하여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어느덧 1학기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평소 공부를 한 대로 성실히 시험을 치렀다. 최상위권에 해당하는 중간고사 성적으로 생긴 오해와 의심을 풀기 위해서라도 기말고사는 매우 중요했다.

계획대로 충실히 노력하였더니 최상위권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중간고사에 이어 기말고사도 좋은 성적이 나오자 중간고사 이후 부정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던 의혹의 눈초리들이 사라져갔다.

모든 선생님들과 동급생들도 있는 그대로, 학교를 빛낼 가능성 있는 학생 가운데 한명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덤으로 장학생이란 수식어도 따라다녔고 학비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입학 당시엔 '늦깎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을 끌었다면 이제는 어엿이 학업성적으로도 주목받게 되었고 기말고사 성적은 우등반 학생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열등반 학생이 우등반 성적을 뛰어넘었으니 충분히 자극제가 될 만하였다.

자연히 학교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강한 동기부여도 되었다. 학교 공부를 정말 따라갈 수 있을까 하던 입학 전의 걱정도 말끔히 사라졌다.

더 이상 그냥 '하르방'이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 장학생 하르방'이 되자 자신감도 붙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시험은 선생님들이 직접 출제하기 때문에 수업에 충실하면 어느 정도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치지만 다른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부의 폭이 넓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부 출제 시험들에는 약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하려면 학교수업만으로는 다소 부족한 것도 무시 못 할 현실이었다.

즉 난이도가 높다고 알려진 대학 본고사를 위해서는 학교수업 외에 따로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필수였다.

중학교 과정도 전부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이나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차근차근 정진하는 길만이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은 대학교 2학년이었다. 그 친구들은 미팅이나 MT 등 대학생활의 낭만과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4년이나 뒤쳐진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였고 동시에 열등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짧은 머리에 이제는 사라진 검정색 교복을 입고 길을 가다가 그 친구들이 멀리서 보이면 숨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인정받는 것과는 별개로 또래로부터 멀리 뒤쳐져서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현실이 때때로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더구나 그 친구들이 우리는 벌써 대학 다니는데 다 늙은 나이에 이제야 겨우 고등학생이냐? 어린 동생들하고 학교 다니는 게 창피하지도 않으냐? 말하며 비아냥거릴 때는 무척 자존심이 상하였다.

친구들은 농담으로 그랬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농담 삼아 아무 의미없이 내뱉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가 된다는 말을 새삼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순간 마음속으로 이 상처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그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이미 성숙해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공부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 오로지 인생의 목표를 견고히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것에만 집중했기에 그들의 비아냥거림도 그냥 참아 넘길 수 있었으리라.

나에게는 꿈과 희망이 있다. 내게는 그 꿈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의지도 있다. 그것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들은 이미 대학이나 학과의 선택을 마치고 그 틀 속에서 꿈과 희망을 설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오히려 나는 뒤늦었기에 선택의 폭이 그들보다 더 넓지 않은가! 즉, 꿈과 희망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는 내가 훨씬 넓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대학의 선택도, 학과의 선택도 내 의지와 능력에 따라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1학년 첫 학기를 마치자 장학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그러니 이미 무엇인가를 선택한 그들보다 더 많은 기회로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멋진 꿈과 희망을 얼마든지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의 끈을 부여잡고 학업에만 정진하자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마음이 흔들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이런 순간에 나를 지켜준 사람은 오직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뿐이었다.

막내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면서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떠 올리면 어느새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곤 하였다. 그 모습을 통해 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고등학교 생활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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