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진 변호사 칼럼](3)은사님의 배려로 중학교에 강제 입학하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3)은사님의 배려로 중학교에 강제 입학하다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8.25 2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제주는 과거로부터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 인재들이 많이 탄생되는 곳이다. 이런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수능이다. 대학 수능시험을 통해 유능한 아이들이 서울 유명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왜 그럴까?하는 연구도 하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은 유전자의 우수성과 자연환경을 지목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목표다. 

모든 것은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목표가 없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없다. 그 목표가 아이의 것이든, 부모의 것이든, 학교 선생님의 것이든 다 이뤄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본적인 머리 수준은 같다. 보통 아이큐로 머리좋고 안좋고를 판가름 하는데 세계적으로 한국인들의 머리가 최고다. 즉, 아이큐 숫자가 세자리다. 

다른 나라에서는 두자리가 꽤 많다. 우리나라는 워낙 머리들이 좋아서 세자리 중에서도 천재 근처, 130 이상이 되어야 머리 좋다고 하는데 실상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인들은 머리가 비상하다고 할 수 있다. 전국 어디가도 떨어지지 않고 부지런함도 최고다.

다만, 섬이라는 환경에서 살다보니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교류하는 것이 좀 서툴다. 그러나, 일단 사람을 믿으면 제주인처럼 정이 있는 사람이 없다. 무엇인가 받으면 꼭 잊지않고 갚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살면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이 목격된다.

지지난 주부터 게재되고 있는 허용진 변호사의 스토리를 통해 과거에 우리 어머니들이 엄청나게 철인적인 일을 하고 고생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 그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에 아들이 힘들었다면 그 어머니는 더욱 힘들었다는 것을 지금 아들이 부모가 되고 나면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릴 적 힘들면 어머니한테 투정을 부리기 일쑤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아이의 교육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시절만해도 학교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착하고 마음이 넓으신 분들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느껴진다. 아마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생활의 변화가 크지 않고 선생님이 곧 지도자이고 미래를 점쳐주는 유일한 분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말은 곧 법처럼 여겨져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그런 선생님을 잘 만나서 허용진 변호사는 운명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렇디 않았으면 길가에 돌멩이처럼 이름없는 존재로 사라졌을 것이다. 중학교라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통해 한발짝 나가 자신의 미래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대열에 오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기회라고 하지만 결코 그 기회가 확실한 것도 없고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남들처럼 하는 그 대열에 낀 것 뿐이었다. 그것이 허용진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뉴스N제주가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의 일생에서 중학교 진학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생각해 본다.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평생 노가다(일본어, 막일)나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공부는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경제적 여건 등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그런 환경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00대학 나왔다고 해도 그렇게 칭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서 거의 학교를 못 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못 간 것을 두고 비교한다는 것은 너무 옹졸하기에 그런 이야기는 가급적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는 온라인 교육 등 누구나 작심을 하면 가능한 시스템이 되어 있다. 문제는 지금 어떤 생각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즉, 태도다. 자세가 중요하다.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느냐가 판가름할 수 있다. 

허용진 변호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엄청난 깨달음을 가는다. 그것은 스승의 얼굴과 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 지 두고볼 일이다.

한편, 허 변호사는 서귀포시 서호동 출신으로 서호초등학교와 남주중·고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인 198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천·울산·광주·서울동부지검 검사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 특별수사관,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의정부지검 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의정부와 서울 등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14년 서귀포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허용진 변호사의 성공 스토리,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은사님의 배려로 중학교에 강제 입학하다

세상살이에서 누구나 한 번 쯤은 뜻하지 않은 선의의 도움을 받아 인생의 진로를 바꾸기도 한다. 그만큼 도움이 소중할 때가 있다. 나도 은사님으로 부터 잊지 못할 아름다운 도움을 받았었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마흔아홉, 어머니는 마흔넷의 나이셨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한마디로 늦둥이였다. 친구들의 부모님에 비해서도 우리 부모님은 상대적으로 매우 연로하셔서 어떤 친구들은 우리 부모님을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버지께서는 10 형제의 할아버지들 중 막내 할아버지의 첫째로 태어나 둘째인 작은 아버지와 함께 성장하였다. 성인이 된 후 일가를 이뤄 생활하던 중 불가피한 사정으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지 상당부분을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 집은 식구가 많은데 비해 농사지을 땅이 약간밖에 없어서 부모님은 주로 소작 일을 하며 날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이어 오셨다.

어머니께서는 틈틈이 삯바느질과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에 밥 짓는 일(일명, 솥밑할망) 등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하셨다.

물론 우리 집만 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적어도 끼니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일부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도 있을 때였다.

아무튼 가정 형편이 그렇다 보니 나에게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자연스레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표가 되어 버린 듯 했고 공부는 먹고 살만한 집안에서 태어난 친구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던 것만 같다.

도대체 공부란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상황이라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중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고픈 생각도 별로 없었다.

형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생업에 종사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즉 중학교 진학은 내가 생각할 수도 생각해서도 안되는 나와 너무 동떨어진 일이었다.

당시에도 집안이 부유하고 공부에 소질이 있는 남자 아이들은 제주시에 있는 학교로 유학 갔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중학교 진학은 했다.

간혹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으나 그 수는 한 학년에 2~3명 정도에 불과했다.

어쨌든 초등학교 졸업이 임박한 시점에서 중학교 진학 여부를 확인하는 선생님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미 마음속에서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과 상의하는 것조차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대부분의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것이 어린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그 상처보다 당장 매일 현실로 다가오는 끼니 걱정이 더욱 나를 힘들게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배고픔을 겪어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힘겨웠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어려움은 글로 전부 표현하기 어렵다. 간간히 방송에서 보도되는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의 어린이들을 떠올리면 그때 내가 겪은 어려움이 조금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살이에는 팔자가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은 갑자기 나타난 귀인으로부터 결정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때가 있는 것인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로 지내던 어느 날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너를 위해 내가 남주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대신 제출했으니 입학시험을 잘 치르라고 말씀하셨다.

어리둥절했다. 진학을 포기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었으니 당황하였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이겠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다시 말씀하였다. 입학시험만 보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남주중학교에서 이미 학비를 면제해주기로 약속했으니 중학교 진학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어린 나이에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몰라 며칠간 고민하다 선생님의 권유라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시험을 치렀다. 선생님은 시험장에 직접 나오셔서 나를 격려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그와 같은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남주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은사님에 대한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그 선생님 같이 특정 학생을 위해 그렇게 애써 주실 수 있는 선생님들이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진학을 포기한 나를 상급학교에 강제? 입학시킨 은사님의 도움은 나에게 매우 유익한 인생살이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은사님은 진정으로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의 어려움을 타개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는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계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은사님에 대한 감사의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아니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물론 크지만 말이다. 내 인생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중요한 도움을 주신 잊지 못할 분이시다.

지금은 정년퇴직 하신 이양수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중학생 시절은 신체적으로 성장이 빨라지는 시기이다. 친구들과 공도 많이 차고 산으로 들로 마음껏 뛰어놀 때이다.

하지만 나는 아침은 보리밥 또는 조밥으로 때우고 점심은 아예 건너뛰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청소년기의 정상적인 발육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여건임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키가 작은 편인가 하고 때로는 웃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도 있다. 물론 즐거운 추억으로 말이다.

과거 남주중학교 교사 전경
과거 남주중학교 교사 전경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점심시간 때면 운동장 모퉁이 한 구석에 홀로 앉아 친구들의 점심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식사를 끝낸 그들과 함께 야구공만 한 크기의 고무공으로 축구를 했다.

축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허기진 배와 마음을 달랠 유일한 방법이 그것 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어느 정도 허기를 잊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마저도 추억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 운동장 구석 한 모퉁이에 쭈그려 앉거나 우두커니 서서 교실 창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한 친구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마냥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느끼는 서러움과 외로움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부모님께서는 밭일을 나가셨다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방과 후 나의 일과는 매우 힘들었다.

수시로 땔감을 마련하러 들판을 헤매고 저녁 무렵에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거나 조밥이나 보리밥 짓기, 물 길어 오기 등 어머니를 대신해 식사 준비를 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즉 나는 저녁식사 당번이었던 셈이다.

그 일이 당시 내가 어머니를 도와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짜증 부리기도 하고 혼자 많이 울기도 하였다. 다른 또래들이 하지 않는 부엌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오고 육체적으로 힘든 순간에 말이다.

방과 후 해질 무렵까지는 어머니 일을 거들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전기불이 없다고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녁 식사준비 등으로 인한 피곤한 몸으로 호롱불에 의지하여 공부하기란 사실상 힘들었다.

물론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으나 마을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집에서 전기를 쓰려면 전신주 설치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하는데 그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늦은 밭일을 하는 동안 내가 저녁밥을 짓던 그 시절 그래도 내가 만든 보리밥과 조밥에 우리 식구들이 즐거워하던 날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때를 가끔 떠올릴 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폭력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입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어린 시절의 폭력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 선생님에 의한 폭력이라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사랑의 매를 넘어선 선생님의 폭력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도 없고 정당화 되어서도 아니 된다."

나의 모교인 남주중학교는 설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립학교였다. 사립학교 학사 운영에 대한 이사장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같다.

요즘도 투명성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이사장의 학교운영에 대한 영향력이 지금보다 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교사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선생님들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학교 3학년 때 수학 시간은 정말 싫었다. 수학이 싫은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싫은 것이었다. 당시 수학 선생님은 학교에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셨다. 그 선생님은 수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정교사 자격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분은 교과 과정에 따른 수업보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취미로 삼는 선생님이었다. 수업시간 마다 어김없이 자화자찬을 늘어놓아서 늘 지루하고 짜증났다.

수업시간에 항상 선생님의 자기자랑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수업을 충실히 하시면 안 될까? 이런 생각만 들던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 남주중학교가 사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리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수업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학교라면 선생님도 결코 이런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고픔을 견디는 것도 서러운 데 선생님마저 저렇게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니 매우 불만이었다.

나도 선생님들께서 교육적 차원에서 들려주시는 유쾌한 경험담이나 세상살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대다수 다른 학생들처럼 많은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실망도 하고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마냥 지루하기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수학시간이었다. 그 날도 선생님께서 여느 때와 같이 자기자랑으로 수업을 일관하는 것에 대하여 지루함을 느낀 나머지 나는 친구에게 장난을 걸었다.

잠시 후 친구도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용히 해! 방금 장난치며 소곤대던 놈 누구야”라며 매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선생님께 지적되기 싫어 애써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 선생님의 눈빛이 친구와 마주친 것이다.

"너 이리 나와."

겁에 질린 친구가 교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선생님은 친구에게 어금니를 꽉 물고 따귀 맞는 숫자를 세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시더니 정확히 친구의 오른쪽 뺨을 스무 대 때리셨다.

그리고 다시 왼쪽 뺨을 스무 대… 선생님께서 친구를 때리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다. 너무나도 무서워 다른 학생들도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교실 안의 모습은 공포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잔뜩 화가 난 상태로 붉어진 얼굴에 독기를 가득 품은 당시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두려움이 밀려드는데 매를 맞고 서 있던 친구가 느끼는 공포심은 어떠했을까?

나와 친구가 수업시간에 잠시 장난을 친 것이 그와 같이 심한 매를 맞아야 할 만큼 잘못한 것일까? 사랑의 회초리 또는 교육적인 훈육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노골적인 폭력 그 자체였다.

간혹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훈육하면서 체벌을 가하는 때에 순간적으로 그 정도를 다소 벗어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때로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곧 냉정을 되찾아 교육적 차원으로 바로 되돌아오곤 한다. 그것이 선생님들의 학생 체벌에 있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다.

나는 매를 맞는 친구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죄책감, 학교 수업이 이래도 되느냐는 극도의 실망감, 배고픔을 참으며 학교에 다니는 것에 대한 회의가 마음속에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과거 남주중학교 교사 전경
과거 남주중학교 교사 전경

저 분이 과연 진정한 스승인가? 최소한의 소양이 있는 사람인가? 사립중학교이기에 그와 같이 자질없는 선생님도 채용된 것이 아닌가? 의문에 의문의 꼬리가 이어졌다. 온통 그 선생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문말이다.

그 선생님은 그와 같은 폭력적인 면이 있는 반면 자신에게 과외수업을 받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너그럽고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과외 받는 학생들에 대하여는 수업 시간에 수시로 칭찬함은 물론 그 학생들이 잘못을 해도 철저히 눈감아주었다.

내 친구도 비교적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과외를 받을 여건이 아니었다. 만일 내 친구가 그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학생이었다면 그렇게 폭력을 당하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그야말로 구역질이 났다.

이튿날 친구 얼굴을 보았다.

양쪽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검게 변하고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로 등교했다. 친구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친구의 부모님들은 그러한 모습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찢어지는 가슴을 어떻게 달랬을까? 제대로 주무시기는 하였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모든 것이 나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친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친구가 매를맞는 순간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선생님에게 말씀 드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용기가 없었다. 비겁했다. 오로지 공포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는 표현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이튿날에도 학교에 나온 친구에게 괜찮으냐?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지도 못할 만큼 그때 나는 용기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학생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육체적 상처는 세월과 함께 묻힐 수 있지만 친구에 대한 미안했던 마음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폭력을 바라보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지금까지 달랠 길이 없는데, 친구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과연 어떠할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고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음이 틀림없다. 당시 그 모습은 바라본 다른 학생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에 대해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데 나의 학창시절에는 그 학교폭력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선생님의 폭력이었다면 믿어질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한 일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 일이다. 반민주적인 야만적인 행태라는 말조차 굳이 필요 없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 선생님이 교단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른 학생들이라도 폭력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단을 떠난 이유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 가끔 소주잔을 기울인다. 성인이 된 후 거의 만나지 못했었으나 3년 전에 부터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친구에게 그 시절의 일을 사과했다. 친구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그때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

친구는 내가 아닌 다른 친구와 장난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서 사실을 바로잡아 주었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말이다.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왔던 만큼 친구에게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폭력을 목격하면서 멍들은 마음의 상처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다시는 선생님의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는 학생들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다음에 계속]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