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진 변호사 칼럼](2)아름다운 서귀포에서 태어나다 ...초등학교 시절 추억 떠올리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2)아름다운 서귀포에서 태어나다 ...초등학교 시절 추억 떠올리다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8.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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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지난 주부터 시작된 허용진 변호사의 스토리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과거 70년대의 모습을 보니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들 먹을 게 없었던 배고픈 시절이라 오로지 허기를 채우기 위한 삶, 노동을 했기에 공부도 사실 노동이지만 밭에가서 일하거나 지네, 산열매 등을 따 먹으면서 살아 왔던 이야기는 지금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달나라 얘기로 간주한다.

허용진 저서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 송이' 표지
허용진 저서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 송이' 표지

그만큼 대한민국이 현재 많이도 발전을 했다는 반증이고 우리가 너무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서전에 '남제주군 서귀읍 호근리'라는 주소가 참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당시에 마을도 촌이었는데 지금은 도시로 되어 있다는 외형적인 변화에서 과거 추억도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100살이 넘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막내 아들이 참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과거 어머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살아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돈을 많이 벌어서 남겨줬던 그렇지 못했던 간에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존경해야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해야 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는 막내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생각한다면 어머니라는 말만 나와도 왈칵 눈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알기에 허 변호사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함께 한 것이리라.

서울 생활의 포기는 많은 고민을 가져다 준다. 특히, 자신이 잘 나갈때 그러한 결정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식의 몫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면 적응하기가 사실 어렵다. 그 환경에 적응하기가 오랜 세월이 흐른다. 왜냐하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서울의 시간은 제주(고향)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어찌보면 답답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적응이 되면 서울의 빠른 시간이 오히려 답답한 것이다. 제주의 느린 시간이 자신의 몸에 맞을 때 다른 곳은 가기 싫고 여기서 안착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적응이 중요하다.

그리고 할일이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지만 고향에서 할 일은 찾아보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고향에 정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걸국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허용진 변호사는 그렇게 고향으로 와서 정착하고 있다. 오늘의 스토리는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술회했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배고픔의 역사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공부나, 예습 복습은 사치임을 선언했다.

그러한 허용진이 어떻게 인생을 설계하고 펼쳐가고 있는지 다음편에 더욱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허 변호사는 서귀포시 서호동 출신으로 서호초등학교와 남주중·고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인 198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천·울산·광주·서울동부지검 검사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 특별수사관,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의정부지검 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의정부와 서울 등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14년 서귀포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소박한 인정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서귀포에서 태어나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은 공간이고 시간이며 어머니의 따뜻함이 배어 있는 마음이다. 그래서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각자 고향이라는 공간에서 어머니의 지극한 모성애를 받고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하는 가운데 때로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애환을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나온 삶의 모습은 그와 함께 했던 기억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흐릿해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기억의 저편으로 멀리 달아나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회상하는 일은 때로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향의 정감과 애환이 깃든 기억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더듬어 보는 순간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고향이란 사람들이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맺어지는 타인들과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고유한 정서를 만들어 주는 추억의 배경 무대로써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고향이란 공간이고 시간이며 곧 마음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고향이라는 일정한 장소 또는 공간에서 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어머니와 고향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고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제주도 남제주군 서귀읍 호근리(현재 서귀포시 호근동), 보리를 비롯한 조, 고구마, 감자, 유채 등 각종 농작물과 달콤하고 향기로운 감귤을 재배하는 아름다운 농촌 마을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모습은 그 옛날에 비해 매우 많이 달라졌지만 북쪽으로는 멀리 우뚝 솟은 한라산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루고 가까이에는 고근산과 각시바위가 손에 잡힐 듯이 함께 보이며,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범섬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낭만적인 모습은 아직 그대로이다.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이나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만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달라진 것이라고나 할까?

30여 년 타향살이를 하다 귀향한 지금 이곳은 밥 짓는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던 작은 초가집들, 그 집들 사이사이로 올레길을 뛰어 놀던 순박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많은 도로, 아파트, 다양한 형태의 상업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새로 들어서는 등 지역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모습이 달라졌다.

그 변화를 따라 102 세이신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도 굵어진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 언제나 사람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향기로운 인간 냄새 풍기는 인정 말이다. 그 인정은 화산으로 분출되기 직전의 용암처럼 뜨거운 모습으로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은 혁신도시 공사가 한창이다. 나의 고향, 세계문화유산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이곳 제주도 서귀포시도 사람들의 바쁜 일상처럼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산다. 모두 다 함께 어려움을 겪던 시절의 추억이라면 더욱 그리워지고, 아름다움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몸소 겪어서 기억하겠지만 어린 시절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사람들이 시절을 한탄하거나 비관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재 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와 관계없이 모두 다 어려움을 겪던 때였기에 각자 굳은 의지 하나로 가난이라는 시대적 고난의 파도를 슬기롭게 헤치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우리들은 풍족한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하였기에 먹을 것조차 부족했던 그 시절을 원망도 비관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가난이라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 초등학교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옥수수 가루나 밀가루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가져가서 옥수수 범벅이나 밀가루 수제비를 만들어 한때나마 배불리 먹고 잠시 행복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요즘 학교 급식을 두고 유기농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급식 문화도 급격하게 변하였다.

우리가 겪었던 지난날의 추억을 말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라고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매우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공통적인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까?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 배급을 받는 순간 느꼈던 행복은 그 시절 가난에 시달리던 대다수 또래 아이들과 함께 느끼던 감정이 아니었을까?

나중에는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를 배급하는 대신 학교에서 옥수수 빵을 구워 나누어 주기 시작했는데 서로 빵을 먼저 지급받으려고 친구들과 다투던 기억도 생생하다. 다른 친구보다 먼저 빵을 받으면 마냥 좋아 우쭐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어차피 모두에게 차례로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인데 먼저 받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배급받은 빵 크기를 비교해가며 서로 자기 것이 크다고 주장하면서 즐거워하던 모습들…

그 때는 친구들과 함께 지네를 잡아다 팔아 풀빵을 사 먹기도 하고 산열매를 따 먹으러 다니며 즐거워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수박, 참외 서리를 하면서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당시 서리 행위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정도 용납되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 말하자면 도둑질로써 명백한 범죄행위가 된다.

그때는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재미있는 놀이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시골 사람들에게 공통된 배려와 나눔의 인정이 살아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달리 보면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누구에게나 공통된 욕구였기에 그 욕구에 따른 행동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작용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도 인정의 또 다른 측면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산딸기와 그 밖의 산열매들을 따 먹으러 다니는 어린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물질적 풍요가 우리 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올레 길이나 숲길을 걷다가 야생 열매와 식용 식물들을 바라보면서 옛 추억을 떠올릴 때면 고향의 정취가 담긴 옛추억의 소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 데 대한 아쉬운 마음도 든다.

검사 또는 변호사라는 이름의 법조인으로 30년 가까이 살아온 나에게도 남의 집 농작물 서리와 같은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를 먹긴 먹었는가 보다.

고향이라는 이름 속에 살아 숨 쉬던 그 옛날의 향기... 내가슴에 젖어 있는 그 아련한 기억들이 가끔 떠오른다.

쌀밥이 귀하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종종 다른 집안 대소사에 부엌일을 도와주고 쌀밥과 돼지고기를 얻어 오시곤 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명절이나 제사 때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에 차례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걸어서 제주도를 일주하는 시간만큼이나 길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예습과 복습을 생각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사치였다. 집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불평하고 참고서인 전과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워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여름에 쉰 보리밥을 물로 헹구어 누룩을 넣고 발효시킨 쉰다리와 누룽지로 끼니를 해결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따뜻한 밥을 주려고 노력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것이야말로 어머니들만이 할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아닐까?

올해 102세로 우리 마을에서 최고령인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평생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아니한 온유하신 분이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하여 마을 인근 요양병원에 계신다.

매일 아침 어머니께 문안드릴 때마다 어머니의 모습에서 지나온 추억과 함께 묻어나는 세월의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아직도 막내인 나에게 "자동차 조심해라. 술은 조금만 마시라. 타인과 다투지 마라" 등의 말씀을 수시로 하시면서 내 걱정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신 어머니, 내 삶의 전부이자 정신적 원천인 어머니, 그리 오래 남지 아니한 것으로 보이는 여생을 큰 질병 없이 지내시기만 바랄 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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