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조미경의 '귀가 없다'
[신간]조미경의 '귀가 없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12.31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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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95 / 208쪽 / 12,000원 / 979-11-90482-99-8 (03810) / 한그루 / 2021. 12. 25.
140*195 / 208쪽 / 12,000원 / 979-11-90482-99-8 (03810) / 한그루 / 2021. 12. 25.
140*195 / 208쪽 / 12,000원 / 979-11-90482-99-8 (03810) / 한그루 / 2021. 12. 25.

| 출판사 서평 |

불완전한 유년과 내면을 조명하는 소설집

조미경의 첫 소설집 『귀가 없다』가 발간되었다. 소설집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내면을 조명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불우한 가정사, 유년의 상처, 불안한 현재 등 저마다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딘가 결핍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과 동떨어져있기보다는 오히려 밀접하게 닿아있다.

표제작인 「귀가 없다」 속 화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이명으로 괴로워한다. 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인 K는 1학년인데도 아직까지 한글을 떼지 못했고 수업 진행이 어려울 만큼 산만하다. 힘들고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공통사는 화자 자신으로 하여금 K를 보살펴줘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지만, K를 보살피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 화자는 그 일에 손을 떼고 만다. 긴 세월이 흘러서도 유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동거」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화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불행을 끊임없이 한탄하는 엄마에게 시달렸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엄마를 두고서 여전히 자식 노릇을 해야 하는 화자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속박된 굴레가 어렵기만 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일 때,

찾아오는 스산한 공포

불완전한 내면의 세계를 내보이는 소설과는 달리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고 온전해 보이지만 서서히 불안을 자아내는 소설도 있다.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는 도시에서 살아온 이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동네가 시끌벅적해진다. 아이들의 학교 문제를 비롯해 전반적인 마을의 분위기를 좌우해가는 이주민들 앞에서 토착민들은 한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세련됨과 완벽함이 마냥 온당하게 여겨지는 세태에 대한 물음을 자아낸다.

SF 형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 허궁」은 팬데믹으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해지자, 임신 로봇 ‘허궁’이 등장한다. ‘허궁’은 임신과 출산뿐만 아니라 아기를 돌보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허궁 프로그램도 오류는 피할 수 없었다. 위태롭게 이어가던 안정감 또한 허상이었고 끝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조미경의 첫 소설집 『귀가 없다』의 소설 여섯 편은 모두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룬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내면을 보여주고 완벽함이 주는 허구를 꼬집어 내기도 한다.

결핍된 유년기를 소설 여섯 편으로 담은 소설집 『귀가 없다』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벽과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디에선가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을 여러 이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약한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데 집중한 조미경의 첫 소설이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기를 기대해본다.

| 저자 소개 |

조미경

제주 출생.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

현재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

| 목차 |

귀가 없다

우리 집에 왜 왔니?

동거

한글 공부

똥돼지

그녀, 허궁

발문 | 불온한 성장통 (양혜영 소설가)

| 책 속에서 |

P.34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촤르르르, 착. 촤르르 착. 파도는 쉬지 않고 바위에 부딪쳤다. 부서진 파도는 돌 속을 돌아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다시 몰려온 파도는 바위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촤르르르 착. 한참 후에야 그것이 바다의 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저절로. 바다의 말은 푸르렀다. 하지만 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따라 할 수도 없었다. 이국의 언어처럼 아득하게 들렸다가 사라졌다. 귀가 있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햇다. 나는 한참 동안 바다가 내는 의미 모를 말을 들었다. 이명처럼 들리는 소리.

P.52 처음부터 마을 사람에게 신분이 주는 힘이란 없었다. 힘은 독자적인 것이다. 조금씩 몸피를 불리면서 제가 기울고 싶은 방향으로 달리는 게 힘이다. 그것을 몰랐던 것 어설픈 경계의 토착민뿐이었다. 마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반문하지 않았다. 나 같은 깍두기들이나 별 소득 없는 문장에 얽매여 스스로 가두었을 뿐.

P.96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디귿이 세 개 모이면 무슨 글자가 되나요?”

정희 언니는 세상에 그런 글자는 없다고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나는 세로로 디귿을 연달아 쓰며 엄마를 떠올렸다. 디귿이 자꾸 모이면 우리 엄마가 된다고.

P.163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킨 프로그램의 이름은 에덴이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의 에덴. 지구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정신에서 출발한 에덴은 세계의 구조를 인간 위주로 재편성했다. 에덴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윤택과 편리를 바탕으로 한 안전과 청결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수시로 공중에 뜨는 홀로그램 화면을 통해 에덴동산을 구체화했다. 깨끗한 거리에서 정갈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 치 오차 없는 질서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 곳은 선악과가 자라거나 뱀이 출몰하는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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