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교 칼럼](30)신(神)의 침묵(沈默)
[유응교 칼럼](30)신(神)의 침묵(沈默)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4.28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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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시조시인
전북대 명예교수
한국예술문화 대상, 해양문학상, 전북문학상, 전북 아동문학상, 소년 해양문학상, 새전북 문학상, 디카에세이상 첫 수상자

시인 유응교 '그리운 것이 아름답다'라는 시집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해학과 웃음, 그리움을 선사하는 전북대 건축학과 유응교 교수가 뉴스N제주에 그의 시조를 소개하는 '유응교 칼럼'을 연재합니다.

그는 둘째 아들(저자 유종안)이 쓴 '대한민국 브랜드 파워'라는 책을 보고 ▲태극기▲무궁화▲한글▲한복▲한식▲한옥▲한지▲국악(판소리)▲아리랑▲인쇄술(직지심체요절)▲조선왕조실록▲사물놀이▲전통놀이▲K-Pop▲도자기(달항아리)▲팔만대장경▲거북선▲태권도▲한국의 시조▲한국의 온돌-아자방▲한국의 막걸리▲한국의 풍류-포석정▲한국의 불사건축-석굴암▲한국화 김홍도의 씨름 등 총 24개의 항목에 대해 동시조와 시조로 노래해 대단한 아이디어 창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공학박사 유응교 시인은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사)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8주년 창립기념식에서  디카에세이상 시상위원회(위원장 장영주)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협력약정서를 맺어 가진 우리나라 최초로 공동 시상하는 디카에세이상에 첫 수상자로 얼굴을 알리는 영광도 가졌다.

유응교 시인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출생해 1996년 「문학21」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년문학』 동시 부문 등단,

칼럼집 <전북의 꿈과 이상>, 유머집 <애들아! 웃고 살자> 외 3권, 시집 〈그리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외 25권, 동시집 <까만 콩 삼 형제>외 1권, 동시조집 〈기러기 삼 형제〉외 3권 등을 펴냈다.

한국예술문화 대상, 해양문학상, 전북문학상, 전북 아동문학상, 소년 해양문학상, 새전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전북대 공대 건축과 교수, 전북대 학생처장, 미국M.I.T 연구교수,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건축 추진위원장, 전북예총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대 명예교수다.

유응교 교수님의 해학과 웃음, 감동을 주는 시조를 앞으로 매주마다 뉴스N제주를 통해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유응교 시인
유응교 시인

제30장

신(神)의 침묵(沈默)

북유럽 어느 시골 성당에 사람 크기만 한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에 한번 서 있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며 여러 날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하도 소원을 말하니 딱 하루만 너와 자리를 바꾸겠다. 그런데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된다. 너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이나 기도를 하든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문지기는 절대 침묵하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지기는 예수님의 동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예수의 동상으로 서 있을 때 첫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도박을 즐기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도박을 하러 가는데 돈을 잃지 않고 많이 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한 부자는 갔습니다. 그런데 돈다발이 들어있는 가방을 깜박하고 놓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때문에 침묵했습니다.

두 번째, 조금 후에 아주 가난한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누워있는데 치료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농부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다가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기도를 드린 후 돈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돈 가방은 주인이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때문에 참았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하러 온 사람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청년이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를 하러 온 것입니다.

청년이 기도를 막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예배당 문이 활짝 열리더니 돈 가방을 놓고 간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돈 가방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부자는 다짜고짜 기도하는 청년의 멱살을 잡고 돈 가방을 내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년은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분이 날 대로 난 부자는 청년을 이끌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는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배를 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것을 본 문지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해 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부자는 돈 가방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오너라."

그러자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정도로 잘못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아서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못이 큰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개입해서 해결한 것보다 침묵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부자는 어차피 그 돈은 도박장에서 다 날릴 돈이니라.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느니라.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이니라. 청년은 그냥 두었으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개입하므로 그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그 배는 바다에서 침몰하여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일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인간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못 견뎌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흉내를 낼 필요도 없고, 인간이 판단을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개입은 일을 그르칩니다.

원래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침묵 중에 일하십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버리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침묵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곤충에도, 들에 핀 잡초 하나에도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에 서로에게 유익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어떤 사람은 감옥의 먼지나 열악한 환경을 헤아리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불행과 실패, 일어나지도 않은 염려를 붙잡고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쁨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우리 삶의 먼지를 헤아리고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새로운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사가 찰스 베어드는 꽃이 꿀벌에게 꿀을 빼앗기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수정의 신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밤이 어두울 수록 하느님은 별을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나는 특히 Mark Miller 교수가 작곡한
“I believe(나는 믿네)"라는 노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1945년 독일 유태인 수용소 발견된 다음과 같은 낙서였습니다. 그 글은 어느 무명의 한 유태인이 죽음을 앞두고 벽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나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기도(어찌하여 주님은)'도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의 기도'도 불의한 일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우리는 너무 호들갑을 떱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못 견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시지만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하느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지금은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지만, 지나고 뒤돌아보면 세심하게 하나하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부조리하고 혼란합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자들이 큰소리 치고 활개를 치는 오늘이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침묵 중에 섭리하시고, 침묵 중에 간섭하심을...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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