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큰글자책 《쓰는 마음》
[신간]큰글자책 《쓰는 마음》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11.08 0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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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시린 / 167*235 / 224쪽 / 18,000원 / 979-11-6867-119-5 [03810] / 한그루 / 2023.10.31.

작고 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법
나를 위로하고 세상을 환하게 하는 쓰기 예찬

감성 충만한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엮어온 시린 작가의 신작 에세이다. 제주의 길과 마을로 나섰던 발걸음이 이번에는 작가 자신에게로 향했다. 조금 더 내밀한 기록, 아픈 몸과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1부 ‘눈이 나쁜 아이’는 아프고 약한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말한다. 작가 자신이 그러하기에 세상의 작고 약한 존재들에게 유독 눈길이 머문다. 그들은 상처받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지만,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찾고, 자신만의 위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다.

2부 ‘쓰는 사람이고 싶어서’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선뜻 펜을 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아무나 써도 된다’ ‘최고가 아닐 수도 있다’ ‘글은 내가 쓴다’라고. 글쓰기에 대한 요령보다는 응원에 가깝다. 작가 또한 작고 약한 한 존재로서 글쓰기를 통해 받은 위로와 응원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날씨처럼 이야기가 왔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2023년 장애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았으며, 시력이 약한 이들을 위해 큰글자책으로 만들어졌다.

■ 저자 소개

글과 사진. 시린

뷰파인더 속으로 뛰어들어온 낱말을 발견한 후로 카메라는 또 하나의 펜이 되었습니다. 두 개의 펜을 들고 시의 조각을 모으는 여행을 합니다. 세상의 눈물이 되어 줄 단 한 줄의 시를 완성하고 싶다는 오랜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섬에 왔습니다. 고사리도 모르던 서울촌년이 제줏말도 곧잘 하는 제주촌년이 되었습니다. 오소록한 숲길과 오래된 골목 걷기를 좋아합니다. 마실하며 만난 길, 사람,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며 지냅니다.

지은 책으로 사진에세이 『괜찮지만 괜찮습니다』 『로드 판타지』, 사진시집 『어멍 닮은 섬 노래』, 사진집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서귀포시 중산간마을』(공저)이 있습니다.

■ 차례

제1부 눈이 나쁜 아이

#01 몸에 대한 이야기들

작은 것들에 눈이 간다|느리게 보기|선천적으로|머리털 나고 첨으로|나는 토마토를 못 먹습니다|제 눈에 구피 엄마 눈에 꽃|아픈 손이 고맙다

#02 오래된 물건

고물을 모으듯|좋아하는 것|연필을 깎는다|서랍 속의 낡은 욕심들|오늘을 오늘이게 하는 조금|그래도 역시 냉장고는 있으면 좋겠지만|낡은 차를 보내며|찻잔의 시간|사물 인연

#03 꽃이 폈다고 편지를 썼다

당신 생각이 나서|귤꽃편지|오월 향기|아까시꽃 먹고 맴맴|이름은 서너 개|꽃값|시든 꽃은 꽃이 아닌가

제2부 쓰는 사람이고 싶어서

#01 그래도 쓰고 싶어서

종이만 보면 머릿속도 하얘져서|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한데 대체 뭘 쓴담|내 얘기 책으로 쓰면 열두 권|아무나 써도 된다|너무 뻔해|백날 써 봐야 얻다 써|최고가 아닐 수도 있다|그래서 결론이 뭐야|당신은 톨스토이가 아니다|이보다 잘 쓸 수 있다|글은 내가 쓴다

#02 작고 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법

사진을 씁니다|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느리고 보배로운|집의 입구|집 안의 불을 켜고|아이들은 인사한다|작고 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법

#03 날씨처럼 이야기가 왔으면

일단 씁니다|장래희망|시인과 바다|눈과 시인|다시 방에 들어와 앉기 위하여|외로이 글을 배웅하는 그대들에게|날씨처럼 이야기가 왔으면

■ 작가의 말

약하고 느린 눈으로 봅니다. 세상은 작고 부족한 존재들로 가득합니다. 약하고 느리게 보아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존재들은 외진 데 있습니다. 가볍고 약한 것들만이 구석에 모입니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비어 있는 구석은 없었습니다.

미만한 생명이 한데 모이고 결핍한 몸들은 서로 기댑니다. 살아가는 데 다만 필요한 건 서로의 틈인지도 모릅니다. 기대어 있는 것들이 눈물겨운 까닭입니다. 담쟁이잎만 보면 붙들리는 마음을 뜯어내지 못해 두고 오곤 합니다.

어느 쪽을 보아도 담 앞인 날들에 기대앉은 풀들의 숨은 미쁘기도 합니다. 틈과 곁을 내어주는 돌들도 애틋합니다. 담벼락 귀퉁이에 쓰고 싶고 읽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낙서를 받아준 당신, 연필을 빌려준 당신께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이 글들을 보냅니다.

■ 책 속에서

눈이 나쁜 아이는 여전히 수줍다. 아이가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어른이 된다 해도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는 다는 걸 안다. 나쁜 눈이 부끄러웠던 아이는 구석을 좋아하 고 숨기 잘하는, 부끄러움 많은 어른이 되었다. 이 부끄러 움이 나다. 나는 작은 것들을 잘 보는 나,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내가 되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17쪽)

더 못 쓸 정도로 끝이 닳아버린 물건을 모지랑이라 하고, 제줏말로 모지레기라 한다. 뭉그러진 숟가락 같은 거. 옛날집 문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문고리에 끼우면 빗장으로 딱이었으니까. 모지랑이 대신 큰못을 매어 쓰는 문도 있었다. 대가리 쪽에 줄을 매어 고리에 쏙. 제주 어느 지역에서는 못을 모꼬지라 하는데, 문고리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면 이래서 모꼬지구나, 싶을 정도다. 젓가락을 이용하는 집도 보았다. 숟가락 젓가락은 어느 집에나 있고 닳고 녹슬어 못 쓰게 된 숟가락이나 짝 잃은 젓가락이 늘 생긴다. 기능을 잃은 사물을 다른 데로 이동시켜 새 일을 준다. (48쪽)

좋은 물건이란 비싼 물건이 아니라 나와 잘 맞는-좋은 인연의 물건일 거다. 낡은 이 신발이 지금 내게는 가장 좋은 신발이다. 신은 지 곧 십 년이 되는 여름 운동화. 내 발 모양과 걸음걸이에 길이 들 대로 들어서 좀 두꺼운 양말 하나 신은 듯 약간의 거슬림도 없다. 다른 운동화가 있는데도 결국 이 후줄근한 걸 신고 나가곤 한다. (76쪽)

이름을 아는 존재는 잘 보인다. 후박나무를 알고 나면 소나무만 있는 줄 알았던 숲에서 후박나무를 찾아낸다. 휴대폰 글씨보다 작디작은 꽃마리도 잘만 보인다. 꽃의 이름은 내게 초능력 안경을 씌워주고 타임머신을 태운다. 처음 만났던 때와 이름을 불러보았던 순간으로, 함께 바라보고 향기를 마셨던 사람에게로 데려다 놓는다. (80쪽)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조용한 방이, 누가 훔쳐볼 걱정 없는 개인 컴퓨터가, 멋들어진 장정 노트와 만년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글은 쓸 수 있다. 형편없는 문장을 보는 건 분명 고역이지만 이 엉망진창 문장은 좋은 문장으로 흘러가고 있는 마중물이다. 남이 볼까 두렵다면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때까지 잘 감춰두면 된다. 일단 써라. 그다음에 생기는 문제는 그때 풀면 된다. (123쪽)

숙제로 일기를 쓰는 건 재미없다. 쓰는 사람이 재미없으니 읽는 사람도 재미없다. 남의 일기가 재미있으려면 아무 데나 쓰지 않는 비밀이 있어야 한다. 비밀도 털어놓는 솔직함이 마음을 움직이는 거다. 솔직함이 글에 힘을 싣고, 매력을 입힌다. 그 매력이 당신의 ‘체’다. (143쪽)

나는 오래된 골목을 마실하고, 돌 틈에 난 풀과 꽃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과 글로 쓰는 게 좋다. 나는 보고, 듣고, 쓴다. 당신도 좋아하는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무언가를 만든다.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작가며 예술가다. 창조적인 일을 할 때 즐겁다는 게 증거다. 예술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그때 진짜 내가 나온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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