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박미윤 소설가의 《조용한 외출》
[신간]박미윤 소설가의 《조용한 외출》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2.11.07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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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윤 글 / 140*195 / 183쪽 / 12,000원 / 979-11-6867-053-2 (03810) / 한그루 / 2022. 11. 5.
소설 '조용한 외출' 표지
소설 '조용한 외출' 표지

현실의 부조리와 내면의 틈을 파고드는
고요하면서도 집요한 시선

박미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여섯 편의 단편을 묶었다.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는 작품에서부터, SF적인 설정으로 현실을 비틀어 보이는 작품까지,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여행을 떠나요’는 가상체험 캡슐이라는 장치를 통해 한 인물의 기억과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 ‘당신의 유토피아’는 중앙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계급화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권력과 사랑의 개념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울기 좋은 방’은 울기 위한 방이라는 설정을 통해 차갑고 현실적인 삶 속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서의 눈물이 가능한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조용한 외출’은 지극히 평범한 강춘생 할머니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중’은 평생 물질을 하다 노년에 치매를 앓게 된 어머니와 교수임용을 앞두고 농성장에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딸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어머니의 ‘바다 일’과 다르지 않을 ‘세상 일’의 이치를 끌어내고 있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주인공이 제주에 내려와 상처 많고 사연 많은, 그러나 강인한 해녀 삼춘으로부터 삶을 밀고 나가는 의지를 전해 받는 이야기다.

소설집 전반에 걸쳐 여러 장치를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내면을 파고드는 시선이 느껴진다. ‘조용한 외출’이지만 그 집요한 시선은 닫아두었던 말과 기억을 되살리면서 돌아오는 길을 새롭게 하고 있다.

<저자 소개>

박미윤
2009년 제주신인문학상, 2016년 소설집 『낙타초』, 2020년 장편소설 『연인』,
2022년 소설집 『조용한 외출』, 백록문학상, 영주문학상 수상
제주문인협회 회원, 제주펜 회원, 애월문학회 회원, 애인 소설동인

<목차>

여행을 떠나요…11
당신의 유토피아…37
울기 좋은 방…65
조용한 외출…87
마중…117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53

<작가의 말>

‘느리지만 꾸준히 글을 쓰고 싶다.’
6년 전 첫 작품집 낼 때 작가의 말은 단 이 한 줄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쓰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소설을 계속 쓸 수 있을까 자문하고 의혹에 휩싸여 보냈다.

그러나 글을 전혀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 창작집의 몇 작품은 그런 혼돈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내가 써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실패를 거듭할수록 일상의 균열에서 생기는 개인의 공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내 작품들이 외롭고 지친 누군가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윤주가 빨간 풍선을 들고 여리를 향해 뛰어왔다. 여리는 두 손을 벌려 윤주를 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두 손이 선뜻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겸이 그런 여리를 쳐다보았다. 여리는 자기 혼자 다시 가상체험 속에 남겨진 것 같았다. 여리는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깨어나게 해 줘! (34쪽)

“중앙시스템은 만남을 사람과 사람이 이해관계로 얼굴을 맞대는 거라 정의해 놓았지. 나에게 만남은 이야기야. 자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풀어놓는 거, 앞에 보이는 겉가죽 말고 내가 이렇다고 말로 그려내는 거, 나에게 만남은 이야기야.” (60쪽)

선배의 말이 옳게 들렸다. 나는 며칠 알바비만 챙기면 되므로 ‘울기 좋은 방’의 필요성에 대해 더 따질 필요가 없었다. 울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실컷 울다가 갈 수 있는 곳. 울고 싶어도 울 공간이 없어서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가지 소품을 갖춘 곳. 슬픈 영화, 슬픈 소설, 슬픈 휴지, 슬픈 물을 갖춘 곳. 이곳이 ‘울기 좋은 방’이었다. (69쪽)

춘생은 찬장을 쳐다보았다. 칸마다 가득 찼던 플라스틱 그릇들과 잡동사니들이 싹 정리돼 있었다. 춘생은 그것들이 이 몇 개 빠진 자신의 입 속 마냥 허전해 보이기만 했다. 화가 솟구쳤다. (104쪽)

해리는 어머니가 이 순간 숨비소리를 내는 것이 지금 지치고 피곤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예전의 습관이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가 내는 숨비소리는 낯선 곳, 엉뚱한 상황에서 흘러나왔기에 해리에게는 어머니의 비명처럼 들렸다. (125쪽)

나영은 삼십 년 만에 바다에 다시 나갔다는 해녀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물속의 해녀들은 모두가 비슷해 보였다. 여동생이 죽어있는 것을 본 것은 큰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두려웠던 바다에 다시 들어갈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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