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2023 문수동 '돌 자파리' 개최
[이슈]2023 문수동 '돌 자파리' 개최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10.0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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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리 마을회 주최, 돌빛나예술학교 주관
10월 14일과 15일(오전 10시~오후 4시) 
제주시 한림읍 중산간서로 4659일대서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은 지금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이다.

샘솟는 맑은 문수물에는 100여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돌을 깨고 다듬어 축조한 돌 구조물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또한 4·3때 마을을 지키기 위해 두른 성담도 일부 구간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힘세고 솜씨 좋은 돌챙이가 일곱 명이나 살던 돌챙이 마을이다. 그 중 두 명의 아들이 돌챙이의 길을 이어가고 있으며 제주도 최초의 돌담학교인 ‘돌빛나예술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문수동의 돌챙이를 조명하고 돌과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다양한 돌 자파리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현재 문수동에 사는 주민들, 이곳을 고향으로 둔 이들, 그리고 방문객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돌담도 쌓고 비보답도 복원한다.

동명리 마을회 주최, 돌빛나예술학교 주관으로 오는 10월 14일과 15일(오전 10시~오후 4시) 제주시 한림읍 중산간서로 4659일대(동명리 문수동)에서 문수동 돌자파리 행사가 진행된다.

스코틀랜드 석공 1명, 이탈리아 석공 1명, 일본 석공 2명, 일본 사진작가 1명 참가하며  주요 프로그램으로 ▲비보답 복원 ▲마을길 돌담 쌓기 및 보수▲국제 돌담 사진전(아일랜드, 일본, 제주도)▲문수동 돌챙이 7인의 사진 및 돌 다루는 연장 전시▲문수동 거주 화가 양경환 그림전▲돌 그림 화가 김덕민 작품전▲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 - 돌담 쌓기, 물수제비 던지기, 비석치기, 공깃돌 놀이, 돌에 그림 그리기, 말(포니) 먹이주기 ▲일반인 체험 프로그램 - 돌담 쌓기. 돌에 글씨 조각하기, 송이돌 화분 만들기, 꽃 묘종 나눔▲예술공연 - 문수물 용천수 음악회(14일 오후 5시. 살롱드뮤직, 제주토속소리꾼 문석범) 답 복원 축하공연(15일 오후 4시. 김보람 선생님과 볍씨학교 친구들)이 펼쳐진다.

문수동 돌챙이 유래는 다음과 같다.

문수동 동네를 비롯하여 이웃 마을에 돌 일이 많아진 때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입니다. 이 시기에 감귤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사나운 바람으로부터 어린 묘목을 보호하기 위해 돌담을 높게 쌓는 작업이 흔해졌습니다. 

감귤 과수원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돌로 창고를 짓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비슷한 시기 새마을운동 사업의 하나인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고치는 농촌주택 개량 사업으로, 초가를 허물고 돌집을 만드는 일이 유행하였습니다.

문수동은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하고 땅도 척박하여 한림읍에서도 살기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주로 보리 씨앗 파종 후 12월부터 5월까지 농한기를 이용하여 동네 남자들은 돌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밭담이나 과수원담, 산담을 쌓은 일은 웬만한 남자라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 창고나 돌집 축조와 같은 건축일은 상당한 힘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에 아무나 할 수는 없었습니다.

문수동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돌챙이는 양병옥입니다. 그는 전라도에서 제주시 한림읍으로 이주해 온 장달민에게 돌을 다루는 일을 배웠습니다. 그 후 동네 남자들에게 돌담 쌓는 기술을 전수하고 함께 일하러 다녔습니다. 동네에는 저를 포함하여 양병옥, 조창옥, 양상규, 양상전, 양홍재, 양홍언 모두 일곱 명의 숙련된 돌챙이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보통 한두 명, 많아야 서너 명의 숙달된 돌챙이가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에 비해 유독 문수동에 솜씨가 좋은 돌챙이가 여럿인 이유는 농사만 지어 살기엔 어려운 처지였기도 하지만, 양병옥이라는 최고 실력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림읍뿐만 아니라 멀리 모슬포까지 가서 돌 일을 했습니다. 

돌과 동고동락하던 여섯 분은 먼저 이 세상을 떴습니다. 지상에는 숨결과 손길로 곱게 쌓은, 제주도 등록문화재로 등록 고시된 한림성당의 높다란 종탑과 석조 건물들을 곳곳에 남긴 채. (강승찬)

▲마을에 전하는 답 이야기

문수동 동네는 1558년쯤에 우질둔리라고 나온다.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우질둔리를 줄여 우둔촌이라고도 했는데, 1813년에는 효동리로 개명해 불러왔다.

당시 가구수는 62가구였고 인구수는 315명으로 기록되었다. 1882년에 동명리로 통합돼 현재는 동명리 문수동이라 부르고 있다.

문수동의 중심 출맥인 빌레동산에서 바다 쪽으로 보면, 좌청룡에 비해 우백호가 모자란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인들은 건방〔서북방〕과 해방〔서서북방〕, 즉 비양도와 한림항이 있는 방향이 허하면 마을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인심은 각박하여 모든 면에서 양택지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겨 비보답을 쌓고 그 방위를 보호하고 살아왔다.

답을 쌓을 때는 그 속에는 마을 사람들은 곡간을 가득 채워 주십사 하여 무쇠솥에다 쌀을 한 사발 넣고, 공부하여 과거급제하길 바라며 벼루와 먹과 붓을 넣고, 무병장수를 빌며 타래실을 넣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지전〔백지〕을 넣었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 1948년 4·3때에 다섯 기의 답을 훼손하여 그 돌로 성담을 쌓았다. 그래서 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답들이 있었던 사실을 아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또한 다시 답을 쌓자는 이는 더 드문 형편이었다. 

이제야 갖은 정성을 다하여 이 답을 쌓아 올리니 마을의 평안과 여기에 닿는 인연마다 만복이 깃들기를 바라옵니다. (변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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