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이숙경의 '은유적 시각 - 물질의 기억'
[전시]이숙경의 '은유적 시각 - 물질의 기억'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07.31 2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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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8.13 아라갤러리
미술평론가 김유정

이숙경 작가의 '은유적 시각 - 물질의 기억'이란 주제로 7월 31일부터 8월 13일까지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아라갤러리(관장 이숙희)에서 열린다.

이숙경 작가는 구상화가로 출발하여 제주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이숙경 작가의 작품 화면을 통해 은유적 시각, 우연에서 탄생한 세계를 보는 심리적인 사건이라 표현했다.

◆구상과 추상미술

‘예술은 삶의 리듬을 찾는 불확정의 물질이다.’

영국의 여성 조각가 바바라 웹워스(Barbara Hepworth, 1903~1975)의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높은 차원의 정신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정신 작용은 몸의 느낌, 생각, 행위, 정감, 미적 쾌감을 포괄하는 하나의 영혼의 운동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거나(thinking) 느끼면서(feeling) 살아간다. 우리의 현실은 생존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념과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며 필요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교환된다.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삶은 그 자체의 목적이 사회성을 갖는 것이다. 최소 2인 이상으로 이루어진 가장 작은 조직이 가족이라고 할 때 각 가정들이 모여서 마을과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럼으로써 인구가 많아지고 직업이 분화되기에 이르고 도시의 기능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집적(集積)으로 이루어졌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세계는 일어나는 것의 총체이다(The world is everything that is the case)” 지구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기후, 사상, 종교, 예술 등 인간 사회에서 생산되고 운영되고, 판매되거나. 창작되는 모든 것들이 총체가 세계인 것이다.

거기에 속해 있는 조직과 기구내 직업군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 화해와 공조, 지원과 협력이 우리 세계의 세부적인 모습들이다. 세계는 하나의 얼개처럼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있고, 영향을 주고 받는다. 직업 중 하나인 예술가는 한 사회의 정신적 수위를 보여주는 형이상학과 관련돼 있다.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사회는 사실상 경제적인 토대가 튼튼한 사회라야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예술이 사회의 물적 흥성을 가져오지는 못하지만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문화경제적인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보다 더 발전된 사회일수록 예술의 역할은 창의적인 경제, 산업적인 부가가치, 정서적인 안정, 상상의 즐거움을 배가(倍加) 시킨다.

예술가는 일반인 보다 더 생각한 것, 지각한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말한다. 누구나 표현의 충동(impulse)과 욕구(desire)가 있지만 예술가처럼 표현 행위를 절대적인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회화의 표현에는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그리는 구상미술(具象美術:figurative art)이 있는가 하면, 어떤 대상을 직감에 따라 표현하는 추상미술(抽象美術:abstract art)이 있다.

구상미술은 말 그대로 바로 보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고 추상미술에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즉흥적이고 혹은 우연적으로 마음에 떠오른 이미지를 표현하거나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그림도 있다. 우리는 구상미술에는 익숙해 있지만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어쩐지 낯설어서 어렵다고 느낀다.

추상미술은 자연의 추상적 형태나 구조들로부터 추출되거나 발견되며, 구상미술 또한 자연에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구상미술에서 표현되는 부분 구조들이 추상 형태로 존재함으로써 추상미술과 구상미술과의 매우 유기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추상미술의 독자성은 전적으로 감각지각에 의지하여 비재현적인 형상들을 표현함으로써 20세기 이후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확고히 열 수 있었다.

다시 추상미술을 살펴보면 자연의 인상에 대한 기억들을 새로운 형태로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데 있다. 자연 사물에서 나타나는 생생한 지각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어떤 외부 사물에 속한 물성(物性:quiddity)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인상(印象:mpression)’이라고 했다. 인상은 기억으로 남겨져 하나의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사실 즉흥적인(improvisatory) 것은 사물에게서 받은 인상을 주저없이 그 때의 감흥대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의도나 기획의 방향없이 행위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우연적인 형태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물감은 수채냐 유채냐에 따라 질료의 특성에 대한 차이가 있으며, 기본적으로 색채마다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혼합되면 어떤 것은 물성끼리 결합돼 독특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이질적인 속성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화면에서 물성들의 희석되면서 전혀 예기치 못한 얼룩과 번짐의 효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물질과 반응하면서 우연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또 추상미술은 동어반복적인 자동기술법을 보여주기도 하고, 반대로 철저한 계획 아래 화면의 추상적인 형태들이 구성주의 방식을 도입하기도 한다. 또한 오브제를 이용한 이질적인 물체와 물체 간 서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세계의 구조적 틀, 물질과 기억

“자연은 각각의 것들을 다시금 그 자신의 알갱이로 해체한다는 것, 사물들을 결코 무(無)가 되도록 파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분해에 의해 질료의 알갱이로 돌아간다”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는 ‘사물들 가운데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는 물체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미 기원전 80년 전(2,103년전)에 ‘사물들이 작은 입자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 것이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그것으로 우주가 형성되었으며, 지구의 경우 지권(geosphere), 수권(hydrosphere), 대기권(atomsphere), 생물권(biosphere)이 형성돼 있고, 구성된 물질들, 즉 생물을 포함하여 만물은 여러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질은 순물질로 존재하거나 합성으로 조합되면서 하나 하나 사물로 존재하게 되고, 해당 사물마다 물질의 독특한 성질들이 남아있는 데 이것을 물성(quiddity)이라고 한다.

물성은 ‘무엇임(whatness)’을 밝히는 라틴어 ‘quidditas’ 가 어원으로, “어떤 사물(事物)이 그것이 그것이게끔 결정할 수 있는 특성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이다. 물성은 보편적인 지식의 형태이며, 본질과 비교할 만한 용어라고 말한다.

물질(Matter)은 무엇일까. 물질은 공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질량을 가지며 다양한 자연 현상을 일으키는 실체이다. 일상생활에서는 흔히 정신과 대조되어 사용되고, 형체(shape)에 중점을 둔 용어인 물체(material object)와 대조되어 물체의 재료를 지칭한다.

물질은 원자(atom)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가 질량(mass)이 있으므로 물질도 질량을 가지며, 원자 자체의 크기가 있고 원자와 원자 사이의 거리가 있으므로 물질은 부피를 갖고 공간을 차지한다. 물질에는 여러 화합물이 섞인 혼합물도 있고, 한 종류의 분자로 이루어진 물질도 있는데 이를 순물질(pure substance)이라고 부른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에 알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거부하고, 세계는 인간의 실천에 기초한 경험에 의해 점차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으로 변하여 간다.

즉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e thing-in-itself)였던 것이 인식의 발전으로 '우리에게 있어서의 물'(物)로 되어 간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왜 물질을 옹호해야 하는가. 물질은 살아있다는 생각에서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죽어 있거나 철저히 도구화된 물질이라는 이미지가 인간의 자만심과 정복 및 소비 등 지구를 파괴하는 우리의 환상을 키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인간의 몸 주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순환하는 더 넓은 범위의 비인간 권력들을 감지하지(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러한 환상을 키운다고 한다.

그러나 펠릭스와 가타리는 물질적 생기론을 주창했는데 ‘물질의 활력은 물질-에너지에 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기적 물질성(vital materiality)은 물질에 관한 새로운 존재론적 관점을 내세우는 유물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물질이 길이, 폭, 두께를 가지며 연장적이고 물질적이며 무력한 것이라는 데카르트의 견해를 거부한다. 생기적 유물론에서 “물질은 유동적이고 잠재적인 힘인 생기(生氣)로 정의된다.

즉, 물질은 자아의 안과 밖에서 작동하는 생기로서 간주하고 어떠한 목적성도 갖지 않는 중요한 힘인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한다. “나의 감각은 나의 사유만큼이나 유유자적해야 한다. 내 눈은 보되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대상에 다가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내게 다가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

스피노자는 말한다. “무엇이건 간에 모든 사물은 더 완전하든 덜 완전하든, 그것이 존재함에 따라 동일한 힘을 갖고 언제나 존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점에서는 모든 사물이 동등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의 주요한 뇌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지각을 통해서 기억을 만들고 저장하고 수정한다. 평소 일상생활의 전부가 이 기억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만일 기억이 교란되거나 망각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

애릭 캔델(Eric R. Kandel)이 말대로 “기억은 우리 생활을 하나로 엮는 접찹제이다. 이렇게 통합하는 힘이 없다면 우리의 의식은 하루가 초 단위로 나뉘듯이 수많은 조각들로 해체될 것이다.”

기억은 마치 휘발유와 같아서 30초면 증발해 버린다고 한다. 하루에 수많은 경험과 행위와 행동을 하면서 기억은 만들어지고 어떤 기억은 망각되고 어떤 것은 저장된다. 지금 이순간 머물러 있는 것은 작업기억(working memory)이라고 불리며 작업기억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내 주의가 집중된 순간의 경험이다.

우리의 작업기억은 어제, 일주일, 한 달 전의 기억을 전부 보존하지 못하고 저장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업기억은 매일 부단하게 기억을 생산하게 된다.

바로 지금 듣고, 보고, 악취를 맡고, 단맛을 보고, 기분좋은 감정, 누군가와 대화헸던 언어가 전전두엽의 제한된 공간에 잠깐 머문다. 그러나 작업기억은 시동을 켠 엔진과 같이 늘 가동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으로 몸에 각인된 기억이 있다. 전에 배운 신체기능에 관한 기억을 가리켜 근육기억(muscle memory)이라고 부른다.

날마다 반복해서 집중하고 연습하다 보면 이전에 무관하던 복잡한 신체 동작들이 하나하나 단계를 힘들게 밟지 않아도 물흐르듯이 동작이 연결되고 정확한 동작 패턴이 기억에 저장되기 때문에 이후 부터는 쉽게 운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몸으로 배운 근육기억은 쉽게 손상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배워서 알고 있는 기억은 뇌의 활성화 덕이지만 이를 서술기억, 또는 명시적 기억이라고 한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기억이다. 이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과거 학습한 정보나 경험을 소환해야 한다.

또 감정에 의해 강렬하게 남긴 기억을 섬광기억(flashbulb memory)이라고 한다.

이 기억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 진한 기억으로 남는 일들에 관한 기억으로 결혼, 가까운 사람의 죽음, 합격, 실패, 이별, 사랑 등 희비극의 감정이 충만할 때의 기억을 말한다. 이런 기억들은 반복해서 회상하거나 곱씹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말한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사실 인간을 물리·화학적으로 말하면 원소라는 물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형체의 물질이 다시 몸이라는 큰 형태의 물질을 만들고 생명이 탄생하고 정신이 발현된다.

몸은 그야말로 정신으로 가동되고 기억으로 유지되는 종합복합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비밀이 물질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몸에서 비롯되는 지각과 기억은 다시 몸을 움직이게 하는 생명활동의 핵심 요소라는 점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오랜 시간 우리는 종교와 관습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가려져 신이라는 도그마에서 헤아나질 못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생명의 화학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발효연구였다. 모든 생명은 살아 있는 계(系)가 전체로서만 작동할 때 가능하다. 생물이 자신의 운명을 주관하는 조직되고 통합적이고 자기-조절적인 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숙경의 은유와 우연의 시각

은유(metaphor)는 어떤 사실을 잘 드러나지 않게 하는 작법으로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이다. 바로 사실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돌아가거나 천천히 음미해야만 의미를 알 수 있는 간접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숙경의 추상 작업은 우연을 매우 중시한다. 화면에서 우연적인 효과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조건들이 만나게 된다.

먼저 화면의 재료인 나무판의 물리적인 상태와 유성과 수성의 물감의 여부 고려해야 하고, 색깔의 선택은 어떠 해야 하며, 작업방식은? 그리고 작업 의도는 무엇이고, 주제의 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추상의 의미 해석을 전적으로 관람객에게 맡겨 버릴 것인가.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Arthur C. Danto)에 의하면, 예술은 의미의 구현이고, 그 의미의 힘과 그 진리를 가동시키는 것은 해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예술은 예술가의 정시으로부터 탄생한다.

예술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며, 예술가의 정신과 심리활동에 의해 예술성이 좌우되고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숙경은 구상화가로 출발하여 제주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소금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에서 녹으면서 분해되는 작용을 보여주기도 했고, 곰팡이처럼 얼룩진 흔적의 아름다움을 찾기도 했다. 예술에서 실험적인 탐색은 늘 있는 일이지만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실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어서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기본적인 자기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물성(物性:quiddity)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화면의 나무판에는 나무 자체의 물리적인 성질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결이 있고, 중간 중간에 옹이가 박혀 있다.

나무판은 이미 자연 나무의 속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다른 물성을 만나면서 어떤 작용을 보이게 된다. 물감의 색깔은 이 나무화면에서 예기치 못하는 작용을 보이게 된다. 이미 기획을 위해 마련된 화면과 거기에 던져지고 흐르듯 혼성(混成)되면서 변화하는 어떤 세계를 만난다.

그때 그 세계는 어두운 우주일 수도, 빅뱅의 순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구 어느 열대지역의 우거진 숲일 수도, 동네 가까운 풍경일 수도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혼합된 물성이 어떤 효과로 다가와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가이다.

이것은 우연적인 작업의 요소가 짙지만 절반은 그녀가 물감의 진행된 과정에서 흐름을 조절하기도 한다. 심리적 충동을 일으켜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 또한 드리핑할 위치 이동이나 사람의 힘이 가해지는 것은 잭슨 폴록 자신의 몸이었고, 뿌려진 물성의 작용만은 물감 스스로 이루어졌다.

뿌려질 때 중력의 힘이 미세하게 작용하고 심리적인 강약의 조절도 화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해당 공간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시간은 공간을 떠나서, 공간은 시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변화라는 말, 작용이라는 말 자체에 시공간의 통합적인 운동이 암시적으로 배어있다.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로 변하듯이 고요함에서 혼돈으로 변하듯이, 질서를 향해 달려가는 출발이 되기도 한다.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아들이다. 까마득한 날에 코스모스는 다시 재배열을 필요로 한다.

이제 이숙경의 화면에서 수많은 세계의 시간이 흐름을 본다. 은유적 시각이란 “숨죽여 있던 것들이 꿈틀되면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바로 그녀의 심리적인 사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은유적 시각으로 보면, 하나 하나의 세계에는 물성의 우연에서 태어난 세계들이 있다. 짙은 밤을 연상하는 태초의 세계가 있어 어디선가 온 흰 빛이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별들이 생겨나면서 빛은 어두운 공간에서 확장되고 팽창하고 있다. 청색의 가스층이 만들어지고 뭉쳐지면서 격렬한 운동으로 무엇인가 생성하듯 요란하게 움직인다.

공간은 붉은 기운으로 꽉차고 가운데로 보라색 기운이 몰려들고 있다. 사이사이로 야릇한 초록색 기운이 비쳐진다. 갑자기 수직으로 흐르는 핑크빛 운무가 두꺼운 층이 거대한 기둥처럼 만들어지고 어디선가에서 오는 빛이 모서리를 반사시킨다. 핑크빛은 일시에 적색으로 내려가면서 상층에는 녹색의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녹색은 다시 노란색의 가스를 내뿜으며 느리게 번지듯이 채워진다. 녹색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다. 새벽 같은 하늘에 새로 별이 하나 탄생했다. 이어서 황금색의 하늘이 찬란하게 어느 행성의 배경이 되었다.

녹색으로 퍼지는 노란색의 운무는 점점 깊이 모를 공간을 감싸고 있다. 어쩌면 그 검은 공간은 생명이 탄생하는 블랙홀이 아니었을까. 분명한 것은 이숙경의 세계는 이숙경마져도 창작자에서 관람자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을 포함한 관람객 모두가 충분한 드라마를 구성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실상 그 세계를 우주로 보든, 하늘로 보든, 숲과 대지로 보든 꿈꾸는 자들의 상상의 공간이 된다.

우연으로 혼성된 세계가 나무화면에 만들어지고, 그런 물질적인 작용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의 내면과 현실세계, 그리고 우주와 연결된다는 생각은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물질의 우연한 조합에서 탄생한 생명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도 추상(abstraction)의 도상은 신석기 시대에 등장하는데 창작을 할 때 수많은 효과의 우연을 반복함으로써 결국 점점 더 어떤 확실성에 도달하게 된다.

-. 미술평론가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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