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손녀 정향신, 유족 김연옥 할머니 얘기로 1만여명 울려
[제주4.3]손녀 정향신, 유족 김연옥 할머니 얘기로 1만여명 울려
  • 강정림 기자
  • 승인 2019.04.07 16:5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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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공원에서 1만여명을 울렸던 유족사연
지난 3일 4·3 평화공원에서 손녀 정향신 학생이 유족 김연옥 할머니 얘기로 1만여명을 울렸다.

지난 3일 4·3 평화공원에서 손녀 정향신 학생이 유족 김연옥 할머니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4.3 추모식에 참여했던  1만여명을 울렸다.

다음은 이날 정향신 학생이 소개한 할머니 인생스토리.

1948년 7살이었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불타는 마을을 떠나 매일 밤마다 이 굴 저 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터라 맨발이 참 시렸습니다. 끝내 잡혀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 수용소였습니다.

주먹밥을 하나 먹었을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랑 애기였던 남동생까지 군인들이 다 끌고 나갔는데, 마지막 끌려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발로 밟히고 몽둥이에 맞는 걸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요.

순간 누군가가 확 잡아챘고, 아이는 그만 돌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깨어나 살아남은 그 8살 아이의 이름은 김.연.옥.입니다.

손녀 정향신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정향신입니다. 1942년생인 김연옥 할머니의 손녀고, 제주시에 사는 대학생입니다.

오늘은 4.3 유족이자 후유장애인인 저희 할머니 얘기를 해 드릴게요.

할머니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았습니다.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셨더라고요. 세뱃돈 봉투에 제 이름 정향신 세 글자를 써 주셨던 2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할머니 머리에 애기주먹만한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데요. 그게 4.3 후유장애였다는 것도 작년 4월에야 알았어요.

심지어 10살 때까지 신발 한 번 못 신어본 고아였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요.

저희 할머니는 보시다시피 아주 고운 분이시랍니다. 얼굴도, 마음도요. 오늘은 검은색 저고리에 흰색 치마를 입으셨지만, 사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항상 화사했어요.

또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시는구나 라고만 생각했었죠.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하루 아침에,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버렸다는 사실은... 당시 할머니는 고작 8살이었는데.

여러분, 혹시 ‘헛묘’를 아시나요? 4.3 이후 할머니는 어릴 적 10년 세월을 대구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에서 제주로 헤맸어요.

한강에서 빨래도 하고 아이스깨끼도 팔며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대요. 그러다 꽃다운 18세가 되어 제주로 내려 오셨어요.

제주에서 살아야 부모님을 잊지 않고, 또 내가 누구 자식이고 누구 딸인가를 기억할 것만 같았서요.

친척 삼촌과 함께 시신도 없는 그런 헛묘를 지었답니다. 그래서 매년 그렇게 정성스럽게 벌초를 다니셨나 봅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고기를 안 드세요.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가 물고기에 다 뜯겨 먹혔다는 생각 때문이었대요.

어릴 때부터 참으면서 멸치 하나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죠.

할머니는 그러셨어요.

“나는 지금도 바닷물 잘락잘락 들이쳐 가민 어멍이영 아방이 “우리 연옥아” 하멍 두 팔 벌령 나한테 오는거 닮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령 바다로 들어갈뻔 해져...”

할머니의 바다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너무 미안해요, 할머니. 할머니 삶에 그런 끔찍한 시간이 있었고 멋쟁이 할머니가 그런 아픔에서 살고 계셨는지 몰랐어요.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에야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이제 바라는 게 뭐예요?”

마지막으로 우리 할머니의 마음을 대신 전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3일 4·3 평화공원에서 손녀 정향신 학생이 유족 김연옥 할머니 예기로 1만여명을 울렸다.

“나는 어멍 죽은 거, 물에 떠 댕기는 거... 그런 거만 생각허멍 살았주. 나 어린나이에 어떤 가슴으로 어멍 아방 시께를 하고, 소분을 댕겨져신지. 우리 어멍 아방, 할망 할으방... 아직도 피 묻은 옷 입엉 이시카부덴, 저승갈 때 입는 옷 새로 지어당 산 앞에서 태워드리고 해나서. 우리 어멍네 이런 내 마음 다 알아졈실건가... "

"우리 부모네 4·3에 경 억울하게 죽지만 않아시믄, 학교 공부도 하고, 누구한테 지지 않게, 살아져실 거 닮아. 그 4·3사건만 아니여시믄 나는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도 잘 하고, 어디 관공서에 이신 사람들처럼 당당하게... 경 살아져실거 닮아..."

"이제까지는 억울한 마음만 들어나신디... 그래도 이렇게 나 살아난 얘기 우리 향신이가 다 들어주난, 이제는 속이 다 풀어진거 닮아...”

유족 김연옥 할머니(좌)와 손녀 정향신(우)

할머니.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 이제는 자식들에게 못해준 게 많다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묵묵히 견뎌 온 멋진 사람이에요.

할머니, 저랑 약속해요. 이제는 매일 웃기로..

오늘 4.3 추념식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 지금까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존중해주고 경청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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