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감사원이라는곳에서 일하는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비리때문에 그만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편하지가 않는 법이다. 특히, 배움을 더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현명관 회장이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간다?
가족들이 반대는 안했을까? 그러나 70년대 초반 그 당시에는 유학이라는 것은 꿈도 못꾸고 있을 때 현명관 회장은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가족이 다 같이 떠나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한 번 마음먹으면 일을 끝까지 처리하는 성격인 현명관 회장은 직장에서의 만류에도 결국 그만두고 가족이 일본이라는 낯선 곳으로 떠난다.
이번에 게재하는 '8장 스파이가 된 남자' 편에는 현명관 회장의 '일본 유학 이야기'를 다뤘다. 일본에서의 생활을 실감나게 표현해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내용이 될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긴 비결까지 내용에 있어 더욱 기대되는 장이다.
인생에 있어 '선택'하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정하는 시기가 있다. 이렇게 선택하는 이유는 변화를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결과로 변화된 삶과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가끔 바다가 조용했을 때 태풍이 한 번 불어주면 바다가 뒤집어서 작은 고기 등 생명체들도 먹을 것이 많아지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한 번씩 변화된 삶을 살아야 능률이 오르는 것 같다.
지난 주 모 시청과장과 차를 마시면서 그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부서에서 전혀 안풀리던 일도 새로운 사람이 부임해서 쉽게 해결된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며 무릎을 친 적이 있다.
기존의 눈에서가 아닌 새로운 눈으로 보면 해결책이 보인다는 것이다. 일이 안풀리면 어린 아이에게도 한 번 물어보면 정답이 될 수 있는 게 현대사회인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흘렀다. 2,30년 전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현대사회에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사람은 매일 배워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대는 바쁜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그것이 좋든 안 좋든 간에 바쁘게 사는 사회에 적응하려면 내 자신도 그런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현명관 회장은 그러한 준비를 한 것이다. 그의 스토리는 점점 흥미롭다. 빠르게 전개되는 그의 이야기는 이제 일본에서 어떻게 배우고 한국에서 접목시키는지 지켜보자.
9월의 첫 주말, 비와 더위가 반복되는 이 시기에 코로나로 인해 만나지 못하는 작금,
우리는 멀리 유학을 떠난 가족, 친구, 친척, 지인 등을 한 번 떠올려보자.
둥근달이 점점 크게 보이고 있는 지금, 안부라도 물었으면 좋겠다. 바쁘게만 살지말고 한번 톡이라도 보내주면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현달환 편집장 주]
◆벼락출세냐, 도박이냐
미래에 대한 나의 갑갑증은 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자 더 커졌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아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그해 12월에는 현실이 되었다.
이때 나는 사정 담당 특별보좌관실로 오라는 청와대의 제안을 받았다. 한마디로 벼락출세가 보장된 길이었지만 유신이 무너지고 정권이 바뀌면 바로 역적이 될 거 같아서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감사원에서 같이 일하던 김정섭씨라는 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도약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유학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더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선택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경제 모델을 쫓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배우는 일이 된다. 이렇게 생각이리자 배움에 대한 열망이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어려운 결심을 하고 유학 신청을 감사원 인사부에 내면서 생가지도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직원이 휴직을 내고 유학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방침을 통보받자 나는 또 한 번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감사원의 방침은 "우수한 인력들이 휴직을 내고 유학을 갔다 오게 되면 감사원에 나쁜 전례가 된다. "라며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몇 주를 고민한 끝에 결국 사표를 내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처자식 있는 사람이 생계의 수단을 저버리고 공부를 하러 가다니……….
한번 베팅의 맛을 안 사람은 다시 베팅을 하게 되나 보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시험을 치고 싶어, 그렇게 열병이 났었고 끝내 군함까지 타고 가서 서울고등학교에 합격한 경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일정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었나 보다.
◆고노야로
현명관은 가족들과 함께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생소한 일본어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가 일본이고 이제 일본에서 2년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1973년 7월, 낯선 선진국 속에 이방인처럼 던져진 후진국 사람 현명관의 마음속은 일본인에 대한 저 밑바닥에 있는 분노와, 동시에 우리보다 잘 살고 발달된 선진문화를 향유하는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출구로 가던 현명관은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다섯 살 일본 남자아이 때문에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공항 로비에 떨어뜨렸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놓친 공을 잡으려고 계속 달려 7m 정도 앞에서 공을 잡고 멈추었다. 아이는 돌아보며 현명관을 보고 웃었다. 현명관도 가볍게 웃어주었다.
"고노야로(이 새끼)"
현명관은 속으로 이 말을 되뇌었다. 그건 아이에게 하는 욕이 아니었다.
30년 전 제주도 고향에서 겪었던 일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고노야로는 그가 처음 배운 일본 말이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 일본에 대한 묘한 적개심을 저 밑 잠재의식에 심어준 말이다.
고노야로는 번역하면 이놈이라는 뜻이지만 분위기에 따라 새끼'정도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일본 욕이다.
원래 일본어에는 한국처럼 쌍욕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퍼져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性)에 직접 빗대어 만들어진 욕을 찾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하류 문화 속에 퍼져 있는 욕들은 한국인들의 육두문자는 차라리 정감 어린 수준으로 만들 정도다.
쿠사망(여성의 성기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뜻), 메스부타 (암퇘지. 밝히는 여자), 사게칭(상대 여성의 운기를 떨어뜨리게 하는 재수가 옴 붙은 남자) 등 신체를 놀리고 여성을 비하하며 야비하게 인격을 모독하는 욕들이 발달되어 있는 언어가 일본어다.
이런 최악의 욕들에 비하면 '야로'는 귀여운 수준이지만 분명 일상에서 함부로 쓸 수 없고 사용하면 큰 결례가 된다. 빠가야로, 고노야로는 그래서 일본어로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욕이다.
'고노야로'
그 말은 현명관이 다섯 살 때 처음 들었다. 다섯 살이면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려운 시절이지만 현명관은 고노야로와 얽힌 한가지 사건만은 어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게 기익하고 있었다.
제주도 고향 골목길.
현명관과 또래 아이 몇몇은 귀하게 얻은 고무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그 공은 마을의 비탈진 길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큰길까지 튕겨나갔다.
5살 현명관은 열심히 공만을 바라보며 뒤쫓았다. 공이 그의 눈앞에 가까워지자, 아이는 저 멀리 바다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이빙하듯 미끄러지며 땅바닥의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공이 아이의 손에 잡혔다. 동시에 끼익하는 굉음과 버스 앞쪽 부분이 아이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덮쳤다.
하마터면 버스의 바퀴가 그의 머리와 몸통을 밟고 지나갈 뻔했다. 아이 뒤를 뒤쫓아 달려온 어머니는 버스 밑에서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죽을 뻔한 아들을 부둥켜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일본인 운전수가 차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는 화가 단단히 나서 겁에 질린 5살 아이를 향해 무시무시한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갖다 대고 크게 소리쳤다.
"고노야로! 고노야로! 고노야로!"
어머니는 일본인에게 수 십 번 굽실거리고 울부짖으며 스미마셍'을 외쳤다. 다섯 살 현명관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그는 무시무시한 일본인 운전수의 '고노야로'라는 일본말을 지울 수가 없었다. 1944년, 해방을 맞기 1년 전에 겪었던 일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깊이 숨어 있던 그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현명관과 그의 아내, 아들 둘은 도쿄 외곽 지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고속도로를 달리자, 저 멀리서부터 서울에서 보기 힘든 화려한 도쿄의 야경이 그의 시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는 일본의 수도 도쿄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일본 속의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지금부터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의 부인도 일을 해야만 했고 아이들도 일본어를 배우며 학교에 다녀야 한다.
'과연 잘 해 낼 수 있을까?'
현명관은 혼잣말을 했다.
다음날, 가족이 살게 될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집주인들은 현명관을 보면 한결같이 물어보았다.
"조센진데스까?"
"이이에 (아니요) 칸코쿠진데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이든 한국이든 꺼려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경우,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하는 말속에 언뜻 언뜻 '바카총'(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현명관은 울화가 치밀었다.
"식민지 생활을 한 것도 분통이 터지는데 뭘 잘했다고 저렇게 우리 민족을 멸시하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국력과 기술력, 문화 역량은 결코 일본에 뒤지지 않고 그들도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1970년대, 대한민국의 국력은 일본과 비교조차 어려웠으니 우리를 향한 일본인들의 태도가 어땠겠는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개중 몇몇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게 만들었다. 마치 서울고등학교에 들어간 제주 촌놈이 겪었던 비슷한 일을 어른이 되어서도 또 한 번 겪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겨우 집을 얻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고, 게이오대학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지성인들의 집합소인 대학은다를 것이라 생각했으나 예기치 않은 국제적인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어려움이 생겼다.
먼저 내 주변의 한국 유학생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소문이 퍼지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일본 학생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를 한국의 '스파이'로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