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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관 칼럼](16)군함은 폭풍우를 뚫고...'서울대 합격'
[현명관 칼럼](16)군함은 폭풍우를 뚫고...'서울대 합격'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7.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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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세상에서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열등감', '콤플렉스'라는 말은 일상 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는 감정들은 대개 학력이나 외모, 신체, 성격, 집안배경과 가난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이 열등감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사람은 인생을 멋지게 살게 되지만 열등감콤플렉스에 갖히게 되면 사회생활하는데 무척이나 힘이 든다.

그러나, 열등감은 부정적인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을 살펴보면 그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게 되고 한 우물을 파서 성공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감격하고 흥분이 되는 것이다.

촌놈(?)이 서울에서 겪는 과정은 많이 접해 봤을 것이다.

현명관 회장이 학창시절 서울에서 겪은 일은 길게 얘기를 안해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제주가 더 멋진 곳으로 각광받아서 제주에 산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명관 회장이 고집스럽게 서울에 가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와 관계되는데 문화는 한번 씨앗을 던져주면 잘 자라기도 하고 사그러지기도 하지만 결국 새로운 문화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원리에 따르면, 현명관 회장이 서울에서 내려온 선배의 학교 배지를 보았기 때문에,  어릴 적 피난 온 아이들이 와서 새로운 문화를 던져 놓고 갔기에 마음속에 희망이 남아 있던 것이다.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놓으면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서울에 가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보고 느끼고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 내는 아이디어는 상상하는 그 이상 더 표출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상상을 많이해야 되는데 자신이 상상하는 상상의 범위가 우리가 펼쳐나갈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되는 것이다.

꿈을 꾼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이 이뤄내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는 게  있다. 그것이 바로 열정이다. 열정으로 뭉친 사람에게는 이길 수가 없다. 집념이다. 현명관 회장이 숫돌이 된 것은 그러한 놀림, 열등감을 이겨낸 양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지나고 나면 어릴 적 그러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될 수 있지만 요즘으로 치면 '왕따'같은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잘 이겨내고 참고 공부에 매진했기에 단단한 재목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 희망을 갖는 사람과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희망은 가난한 인간의 빵'이라는 말이 있듯이 절망속에서도 희망은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룰 때 우리는 인생의 참맛을 느끼는 것이다.

매일매일이 도전이다. 지금도 코로나정국에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희망'을 잃지 말자.

현명관 자서전 '위대한 거래'가 그러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쓰러지면서도 놓지말아야할 꿈...'다시 일어난다.'라는 희망을 갖는 오늘이 되자.

점점 더워지는 오늘도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시야를 넓히자.

지금의 큰 위기도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시련에 불과하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칼럼
현명관 회장

제주의 푸른 밤바다에 부슬비가 뿌리던 날, 부부는 오늘도 6남 1녀의 자식들이 잠들자 이불 속에서 그들만의 대화를 수군수군 시작했다.

"여보 요즘 수남이(현명관의 어린 시절 이름)가 이상하지 않아요?웬일인지 계속 부어 있네요."

비가 오는 날이면 고문 후유증으로 유난히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남편이 안쓰러워, 아내는 남편의 허리를 주무르며 물었다.

"뭐가? 중3이니 뚱할 나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매일 방파제 걸으며 하던 영어 암송도 요즘엔 안하는 것 같고 잠도 평소보다 늦게 자는 것 같아요.”

"아… 아.. 거기 거기."

명관의 아버지는 통증에 신음 소리를 냈고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아픈 허리를 계속 주무르다 잠들었다.

방 한편에서 잠 못 이루는 명관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들으며 더 심란해졌다.

"아, 이렇게 내 속을 모른단 말인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 앉은 명관은 말 한마디 없이 밥을 먹었다. 먹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등 자리를 뜨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겠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평소 현명관의 아버지는, 말 한마디만 내뱉어도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표정, 침묵, 국어책 읽는 듯 말하는 '다녀오겠습니다. 여기에 어제 들은 아내의 말이 생각나, 명관을 다시 보니 확실히 아들의 모습은 낯실고 이상했다. 그리고 동시에 답을 찾은 듯하여 자신 있게 아들에게 말했다.

“수남아 앉아봐. 너 요즘 무슨 문제 있니?"

현명관은 귀가 번쩍 뜨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아버지의 답답한 말에 실망하고 말았다.

"네가 너무 공부만 하니까 사내답지 못하고 만날 루퉁한 거 아니나, 수남아, 공부도 좋지만 친구들하고 좀 나가서 놀아."

"휴…..”

현명관은 자신도 모르게 밥상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휴………."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명관을 동시에 쳐다보고 자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이 공부만하던 아들이 작심한 듯 한마디 하려는 순간은 아무리 자식이라도 긴장이 되었다.

“아버지, 도대체 언제 나는 서울 구경합니까? 만날 아버지는 서울 출장 가면서 나는 언제 데리고 가는데요? 이렇게 촌놈으로 서울 한번 구경도 못하고 살아야 해요?"

화난 듯 말을 마치고 현명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획 나가버렸다. 사실 아버지는 한두 달에 한 번 서울 수협으로 출장을 다녔기에 마음만 먹으면, 아들 서울 구경시켜주는 일쯤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아들 모습은 낯설었다.

때문에 말을 마치고 다소 버릇없이 자리를 떠버려도 다시 불러 세우지 않았다. 아들이 학교가는 뒷모습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부부는 자식들 모두 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근심 섞인 목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자네 자나?"

"아니요.”

그 말에 잠을 깬 건 현명관이었다. 그리고 귀를 세우고 이불 속에서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수남(현명관의 어린 시절 이름)이 이 녀석 암만해도 서울병이 단단히 낫는데, 서울 학교 다니고 싶은가 봐. 서울 구경은 핑계고."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개가 서울 학교에 붙을 실력은 될까요?"

“글쎄 제주에서야 좀 한다지만, 아무리 봐도 무린데….”

하마터면 명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나 합격할 수 있어요!'라고 외칠 뻔했다.

"그래도 저렇게 몸이 달아 있는데 시험은 보게 하면 어때요? 어차피 합격은 어려울 테니 소원이나 풀어줍시다."

"그럴까? 내일 수남이한테 서울 데려간다고 말해주구려. 그럼 무슨 말이 있겠지.”

현명관은 기뻤다. 서울에 가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렵게가는 서울이니 시험도 치고 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토록 무서운 바다는 본 적도 없었고 그런 바다에 배를 타고 자신이 뭍으로 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3 현명관은 이런 생각을하면서 가방을 베게삼아 배 바닥에 엎드려 뱃멀미를 견디고 있었다.

군함의 진동과 소음은 여객선과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름 섬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웬만한 뱃멀미는 아무것도 아닌 척, 참아 내곤했지만 지금 LST 해군 상륙정의 멀미는 일반인들이 타는 배와는 차원이 다른, 지옥 같은 뱃멀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폭풍우 속에서 금방이라도 뒤집히고 침몰할 듯 배는 위아래로도 좌우로도 요동쳤다. 군함은 집채만 한 파도를 타고 수백 번 높이 솟구치고 처박혔다. 현명관은,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듯 지그시 눈을 감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군인들이 그저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난 후 현명관은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죽을힘을 다해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배의 흔들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 목포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아~ 아버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고 바지를 잡아 흔든 후에야, 군함의 소음을 넘어 명관의 목소리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

아버지는 손가락 4개를 내보이며 네 시간이라고 소리쳤다. LST는 배의 앞부분, 상륙램프가 있기 때문에 여객선 보다 느렸다.

2시간 전 저녁, 원래 현명관은 제주항에서 여객선을 타려고 했었다. 그러나 풍랑으로 제주에서 뭍으로 가는 모든 배편이 취소되었다.

서울 구경을 하고 싶다는 건 핑계였고 한국에서 가장 서울대를 많이 보낸다는 서울고등학교에 원서 한번 내보는 것이 현명관의 소원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해 겨우 날을 맞췄는데 하필 풍랑에 배편이 모두 사라지다니, 현명관은 통곡할 지경이 되었다. 원서를 내야 뭐라도 해 볼 텐데 아예 원서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아들의 마음을 안 아버지 현여방은 애가 타서 그때부터 육지 가는 배를 수소문했다.

"오늘 밤 반드시 목포로 가야 한다. 언제 다시 배가 뜰지 알 수 없고 그렇다면 시험도 보지 못한 수남이는 평생 한이 될 수도 있다. 난네가 떨어질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금은 반드시 목포로 데려다 주마. 그래서 시험만은 치르게 해 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물보라 치는 방파제를 바라보던 아버지 현여방은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수협 쪽으로 아들과 함께 달렸다.

수협의 김계장이라면 그를 도와줄 것 같았다. 7년 전 군수사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 현여방씨는 후배 이름을 대지 않았다.

흔한 좌익 사상범 한명의 이름을 대고 나오면 될 것을, 고지식한 그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끝까지 후배 김계장 이름도 대지 않았다.

그 덕에 보통 하루면 끝날 고문이 3일을 갔다. 하지만 수협 김계장은 현여방씨 덕에 고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4.3을 넘겼다.

“김계장, 나 좀 도와주게. 아들이 서울로 시험을 치러 가야 하는데 배가 없어서 갈 수가 없게 됐어. 어떻게 방법이 없겠나?"

"이 날씨에 배를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부두를 보며 김계장이 놀라 되물었다.

"그래 배. 배를 타야 목포에 가고 서울을 가지.”

김계장은 현여방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더니 잠시 후,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형님,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폭풍우라 민간 배는 절대 바다로 나갈 수 없지만 군함은 오늘 육지로 갑니다. 어쨌든 그 배는 가요."

"제가 아는 분이 그 배 함장이에요. 형님도 아시는 분일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김계장의 두 손을 꽉 잡으며 울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김계장!”

현명관도 뛸 듯이 기뻤다. 물론 그 배가 무지막지한 LST고, 지옥의 뱃멀미를 만드는 군함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1시간 후, 해군 대령의 배려로 두 사람은 LST에 군인과 함께 올랐다.

함선에 오르자마자, 현명관은 군함을 타고 폭풍우를 견디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잔인한 폭풍우는 깡통 속에 든 메추리알처럼 LST를 탄 군인과 현명관 부자를 내동댕이쳤다.

"이러다 배가 침몰하는 것은 아닐까? 죽으면 시험을 못 보는데……"

군함은 밤을 새워 폭풍우를 뚫고 나아갔다. LST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처럼 상륙 램프를 열어, 현명관 부자와 군인들을 목포항에 토해냈다.

1944년 6월22일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유타해변에 있던 LST(사진 David Kerr) 중3 현명관과 아버지가 함께 타고 간 LST와 같은 종류의 배
1944년 6월22일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유타해변에 있던 LST(사진 David Kerr) 중3 현명관과 아버지가 함께 타고 간 LST와 같은 종류의 배

현명관은 아버지의 서울 수협 친구 집에 머물며 서울고등학교입시를 준비했다. 마침, 친구는 서울 중학교 3학년이었기 때문에 서울고 입시 예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문제집으로 현명관은 죽어라 공부했다.

현여방과 그의 아내는 아들이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험을 치게 되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고난과 해결책이 모두 예비 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시험 한번 치고 끝나기 위해 이런 우여곡절을 겪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서울 명문고 들어가는 게 그렇게 쉽나요? 걔도 세상 넓은 줄 알겠죠. 합격은 꿈도 꾸지 맙시다."

“그렇지? 허허 어찌나 자신 있다고 하는지 깜빡 나도 넘어갔네.” 현여방이 말했다. 듣고 있던 아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저러다 덜컥 합격해도 걱정은 걱정이죠. 뭔 돈으로 유학을 감당합니까."

"당신은 너무 걱정 마시구려. 그냥 소원 풀이해 주는 거니까.”

내심 합격을 했으면 하는 마음과 낙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뒤섞인 이상한 대화가 부부 사이를 오갔다.

현명관은 시험을 봤다. 자신이 있었으나, 예상과 달리 평소 잘하던 영어는 망치고 자신 없던 수학은 선방을 했다.

10일 후 합격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시험 보기 전보다 뚝 떨어진 상태가 되어, 중3 현명관은 명단이 붙어있는 서울 고등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숫돌

놀랍게도, 나는 합격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합격하고 사시 1차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이때의 감격에 비할 수는 없었다.

흰 종이에 붓글씨로 적힌 내 이름 석 자를 발견한 순간, 이 감격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드디어 제주를 떠나 피난민 친구가 말해준 서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오랜 노력에 대한 보상을 하늘로부터 확인받은 이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합격 소식을 제주에 계신 부모님께 전했고 부모님도 놀라고 기뻐하셨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학비 등, 현실 문제도 뒤따라왔기에 부모님의 근심은 더 구체적으로 두 분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 돈 문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할 때까지 끊임없이 두 분을 옭아매었다.

그런데 나에겐 돈 문제 보다 더 끔찍한 괴로움이 입학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문화적 충격과 열등감이 나를 완전히 짓누르고 말았던 것이다. 돈 문제는 내가 겪은 이 문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당시 서울고등학교는 지금으로 말하면 특목고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학교를 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집안의 후원이요, 재력이다. 당시 서울고등학교는 최고 명문이었기 때문에 영화나 뉴스에서만 보던 유명인의 자제들이 너무도 많았다.

당시 자유당 부통령 이기붕 아들 이강석이 선배로 있질 않나, 둘째 아들 이강욱은 같은 학년, 장차관 아들부터 큰 기업의 자식까지, 동창 아니면 선배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장 선생님은 전체 조회시간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주옥같은 아이들이라면서, 서울 중학교가 아닌 타교 출신 학생들을 소개하는 일이 생겼다.

서울 중학교가 아닌 타 중학교, 그것도 지방 출신자들이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왔다며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나를 포함해 불려 나온 타교 출신 삼십여 명의 아이들에겐 그 말이 수치심으로 돌아왔다.

지금으로 말하면 '수업 끝나고 다문화 다 모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그 사건 이후 나의 별명은 '주옥'이 되었다. 주옥 중의 주옥, 완전 깡촌 제주도 출신자 현명관은 '주옥'으로 불리며 놀림당했다.

"야, 한라산에서 공차면 바다에 떨어지냐?"

내 귀를 거스르고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남기는 말들과 행동이 이어졌다. 그 거슬림, 화남, 자존심의 상처,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고독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속에서 엄청난 오기가 생겼다. 저들을 다 공부로 눌러주겠다. 끝없이 '주옥'이라고 놀려대는 부잣집 아이들과 권력자의 귀공자들이 하는 말은 귀를 타고 마음으로 들어가, 그대로 숫돌이 되어 나의 마음을 갈고닦아 주었다.

거슬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태의 구렁텅이로 빠지려는 나를 순간순간 건져 냈다.

고2가 되자, 방값을 내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유혹이 찾아왔다. 같은 반 친구 집에 들어가 살아 보겠냐고 담임 선생님이 제안했다.

그 친구는 엄청난 부자였는데 그 부모가 공부 잘하는 친구와 함께 먹고 자며 공부를 시키기 위해 파트너를 찾는 중이었고,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취보다 잘 먹을 수 있었고 방값도 들지 않았지만 맘이 편한 곳은 아니었다.

마치 TV 미니시리즈 드라마 속 가난한 주인공 생활을 하면서, 난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도 종종 당했다. 제일 큰 문제는 같은 방을 쓰던 부잣집 친구가 10시면 불을 끄고 자는 통에, 늦은 시간까지 달아오르던 내 학구열을 매번 식혀야 했다.

궁리 끝에 나는, 친구가 잠이 들면 몰래 그 집을 나와 불빛을 찾아 학교로 갔다. 학교 물리실로 가서 암막 커튼을 치고 새벽 세 네 시까지 공부를 한 후 등교했다.

숙직하는 선생님한테 걸려서 쫓겨난 후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고 끝내, 2학년 말에는 전교 일등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고된 생활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를 버티게 했던 힘은 괴롭고 거슬렸던 동료들의 놀림이었다.

귀로 항상 거슬리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항상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그건 곧 덕을 발전시키고 행실을 갈고 닦는 숫돌과 같은 것이다.
만약 말마다 귀를 기쁘게 하고 일마다 마음을 즐겁게 한다면 그것은 곧 인생을 무서운 독극물(짐독) 속에 파묻는 것과 같다.

이중 상문역이지인 심중 상유불심지사
耳中 常聞逆耳之言 心中 常有排心之事
총시진덕 수행적지석
繞是進德 修行的砥石
약언언열이 사사쾌심
若言言悅耳 事事快心
변파차생 매재짐독중의
便把此生 埋在烤毒中矣  -. 채근담 / 전집 제5장

고3 1학기가 지나갈 즈음 폐병에 걸려 강제 휴학을 해야만 했었다. 결핵은 전염병이라 불리던 시절, 학교는 내게 휴학 조치를 내렸다.

식빵 하나에 허기를 달래며 공부하다 보니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생긴 병이었다. 대입 준비로 정신 없어야 하는 고3 시절, 병 때문에 제주 집에 내려가 쉬고 있으려니 조바심이 말도 못 하게 생겼다.

이렇게 서울대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 되는 건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2학기 절반을 쉬고 올라와 다시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 매진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노력과 집중이었다.

그렇게 나는 꿈꾸던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다. 이 모든 건 마음속 숫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같은 반 친구부터 부잣집 친구까지, 나를 놀리는 말은 숫돌이 되어 더욱 공부에 매진토록 해주었다.

그들의 말은 나를 연마한 숫돌이었다. 힘들 때마다 마음의 숫돌로 나를 갈고 닦았고, 그래서 지금도 나를 놀리고 모욕했던 친구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친구였다.

현명관의 21세기 채근담

나를 놀리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나의 응원군이고 팬이다. 그들로 인하여 우리는 갈고 닦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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